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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경의 지구촌의이웃들

走馬燈(주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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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작은 크리스탈 장미가 부러진 걸 발견했다. 이를 남편이 버리려고 하자 ‘안 돼요’, 나는 앙증맞은 크리스탈 장미를 준 남자를 떠올린다. ‘여보, 최동성씨가 14년전 우리 떠난다고 준 선물인데’ ‘아, 그럼 간직 해야겠다’ ‘그런데 그 분 살아계시겠지?’ ‘누가 알려줘야 알지’ 나는 바로 인터넷을 두드렸다.
 
‘최동성 장례식’ 이란 문구가 뇌를 때렸고 떨리는 가슴으로 읽어 내려갔다. ‘돌아가셨구나’ 불가리아 한인회 홈페이지에 의하면, 이주일이나 최동성씨가 연락이 없자 경찰이 의사를 동반 그의 집 문을 부수고 바닥에 쓰러진 최동성씨를 발견한것이 2014년 1월 20일경 이었다. ‘이렇게 쓸쓸할 수가’ 그의 인생역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는 1950년대 불가리아로 온 북한 유학생이었다. 북한에서 성분 좋고 공부를 잘해서 뽑혀 기차를 타고 불가리아 소피아 대학에 유학을 온 과학생도였다. 그러다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의기투합한 북한유학생 3명과 함께 목숨을 걸고 불가리아에 망명을 했다.
 
1998년에 소피아에서 만난 최동성씨는 북한 말씨를 쓰는 육십 대 독신남성이었다. 평생 결혼도 안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다 불가리아에서 생을 마감한 경계인이었다. 북도 남도 아닌 경계인. 그의 장례식에는 한국을 국빈 방문한 바도 있는 그의 소피아대학친구 젤레프 전불가리아 대통령이 참석했다. 1995년 무렵 젤레프 대통령이 한국 국빈 방문시 최동성씨가 동행했다한다.
 
인터넷 장례식 사진을 보니 젤레프씨가 한 많은 한국인 친구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는 게 느껴진다. 남북한 분단의 한가운데서 소용돌이 인생을 살다 가버린 외국인친구를 조문하고 있었다. 그는 정직했고 음악을 사랑했고 무엇보다 자유를 사랑한 남자였다. 최동성씨 사후 일 년 만에 지난 2015년 1월 30일에 든든한 친구 젤레프 전대통령이 79세로 돌아가셨다는 것도 인터넷으로 알게 되었다.
 
‘최동성, 1939~2014‘ 사진 속 장지 화환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유족도 없고 장례비용도 없어 주불가리아한국대사관에서 장례비를 대주었다고 한다. 불가리아 한인회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져보니 놀랍게도 망명학생 네 분이 다 돌아가신걸 알게 되었다. 2014년 1월 최동성씨 사후 같은 해 11월에 이장직씨, 12월에는 이상종박사가 돌아가신 것이다. 한 기차를 타고 꿈을 품고 머나먼 땅 불가리아로 유학 온 20대 유학생들이 그 유학을 온 땅에서 작년 한 해 80이 가까운 나이에 죽었다. 10여년 전에 돌아가신 최동준씨를 따라 나머지 세 분마저 다 가버리셨다.
 
극적이다. 유학, 망명, 죽음-5막 5장 모두 함께 막을 내렸다. 생로병사 4막이라면 이들에겐 목숨을 건 망명사건이 한 막 더 첨가된다. 너무도 안타깝다. 분단의 비극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직도 진행형인 남북에서 그들의 망명스토리는 스릴은 있을지 몰라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 쓸쓸하다.
 
성분 좋은 북한출신 젊은이들이 1950년대에 청운의 꿈을 안고 당에서 해 준 양복을 입고 기차를 타고 머나 먼 이국땅 불가리아에 유학을 왔다. 와서 살아보니 현실을 알게 되었고 김일성이 다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몇몇 동지들과 함께 북한으로 돌아가길 거부, 소피아 시내 비토샤 산에 숨어든다. 그러다 발각되어 소피아북한대사관에 감금, 이상종씨와 이장직씨는 북한대사관 담을 넘어 탈출, 최동성과 최동준 학생은 평양 압송 직전 공항에서 여권을 찢고 극적으로 탈출한다.
 
이들 네 명의 탈출 뒤엔 불가리아 정부의 도움이 있었다. 이들을 아무도 모르는 불가리아 내 도시에 살게 해 주었다. 이들의 진정한 후원자는 구소련이었다. 당시 공산진영 안에서는 대단한 사건으로 후루시쵸프 소련공산당서기가 이들을 구출해 주라고 언급을 할 정도였다. 이후 불가리아와 북한 외교관계가 8년 끊기게 된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불가리아와 대한민국이 수교되고 내가 불가리아에 살던 때 가끔 네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한국방문도 하고 세분은 현지 불가리아 여성과 결혼하여 자식들도 있었다. 최동준씨의 딸은 치과의사가 되었고 만난 일이 있다. 최동준씨의 부인 생각이 난다. 내가 그 집을 방문했을 때 그 추운 겨울에 불도 켜지 않고 난방도 하지 않은 채 살고있었다. 그런 부인은 철저한 공산주의자로서 스타라자고라 대학교 교수였다. 자기 남편이 생사고락을 같이 한 다른 세 명의 북한 유학생들이 남조선을 조국으로 부르게 되자 이들을 배신자라고 부르며 자기집에 출입을 금지시켰다고 했다.
 
한민족 해외동포 잡지에 최동준씨가 쓴 수기를 읽은 적이 있다. 페레스트로이카 후 코트라 전시장에 조심스레 들어가 대한민국과 조우하던 감격적인 장면은 마치 영화 같다. 최동성씨는 클래식음악을 매우 좋아 하셨다. 음악을 들으며 못 돌아가는 북한의 고향을 그리워했음을 짐작했다. 또 한 때 사랑했던 여자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분들이 하던 한국어는 50년대의 북한 말씨로써 방학 때 불가리아에 온 내 아이들이 잘 알아듣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한번은 최동성씨와 산에 갔는데 덜그럭거리는 옛날 알루미늄 도시락 통에 하얀 각설탕을 담아 가지고 와서 의아해한 일이 있다. 사탕이면 사탕이지 왜 각설탕을? 문화차이 에피소드가 더러 있었다.
 
62년 네 명의 망명유학생들은 거사에 너무도 많은 에너지를 소진했을 것이다.조용히 지내다가 젤레프씨가 불가리아 대통령이 된 후에 국적을 취득했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일을 했다. 이제 모두 불가리아 땅에 뼈를 묻었다. 그들의 명복을 빈다.
 
 
[2015424일 제6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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