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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경의 지구촌의이웃들

뉴타운

 
 
유자향이 발목을 잡았다. 가을이와 늦가을 산보 길에 오늘은 유자 한 봉지를 사들고 왔다. 전남 고흥서 온 유자라며 전라도 말씨를 쓰는 가게 아저씨가 자랑한다. “아저씨 고흥분이세요?” 아니란다.
 
가게 아저씨와 이말 저말 주고받으며 쇼핑을 하다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온 느낌이다. 이사라면 신물이 나지만 이번에 둥지를 튼 곳은 신기한 곳이다. 북한산 밑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산책길 이웃여자는 절 간이라고 표현했는데 딱 들어맞는 분위기다. 그 여자는 절간이 싫어 좀 분주한쪽으로 옮기려한다. 수퍼마킷이 없고 PC방도 없는 마을이 나는 좋은데. 빌딩숲으로 위세를 떨치는 서울이라는 곳의 이단아 뉴타운은 과연 뉴타운이라 이름 붙일만하다.
 
뉴타운은 진짜 올드타운처럼 으리으리하지 않고 나지막해야하고 적막해야하며, 그러려면 다른 사람들이 진가를 몰라줘야만 그 가치가 유지될것이다. 유자향 때문일까? 인터넷을 뒤져 유자차 담그는 법을 읽다가 샛길로 빠졌다.
 
사랑방도 둘러보고 또 다른 샛길에서 이 글을 쓰기에 이르렀다. 힘들게 유자차 담아 먹는 것보다 두고 냄새 맡는 편이 훨 수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이미 함께 사는 시어머님께서 보셨으니 반만 담기로 하자.
 
이사 와서 삼시세끼 조달 등 노동도 노동이지만 여러 종류의 소리들을 파악하고 일일이 응답을 하는 등 새 정착민이 헤쳐나가야 할 과정을 겪느라 분주했다. 요즈음엔 웬 벨소리들이 그리도 다양한지 말러도 소리고, 초인종도 전화도 소리다.
 
전화국에서 나왔거나 청소도우미가왔거나 초인종을 누른다. 아무 대답이 없자 내 핸폰으로 전화를 한다. 핸폰 소릴못 들은 나는 부엌일을 계속한다. 핸폰을 어디다 두었는지 잊어버렸다.
 
아니 아예 핸폰이라는 게 내게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듯. 전화를 안 받는다는 불평들이 이어지자 어느 날은 아예 전화 목걸이를 하고 다니기에 이르렀다. 나는 벨소리 응답을 위해사는듯하다.
 
사실 전화교환수라는 직업도 있었다. 초인종이 울리면 지하인지 1층인지 현관인지 구별하느라 허둥대고 의무적으로 다양한 전화벨 소리에 귀를 기우린다. 어머니 전화왔네요 그래? 어느 전환고? 나 이런! 바로 옆에서 울리는 당신의 핸폰 소리를 내가 듣고 알려줘야만 하니 아, 나는 벨 소리들에 지쳐있었다.
 
세 식구 중에 그중 내가 젊고 귀가 밝으니 내 귀는 바다소리가 그리워 열려있는 소라껍질처럼 부름에 늘 열려있어야 하며 그리고 내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마침내 하루 노동을 마치고 창을 향한내 사랑하는 자리에 간신히 앉아 본다.
 
밀레의 저녁종이 떠오르는 순간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가 흐르자, 나는 무언가에 끌린 듯 눈팅 대신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날 귀찮게 하지 않는 이 시간은 얼마만인가.
 
종교처럼 다가오는 시간, 늦가을 창밖의 묵묵한 나무들은 점잖기 짝이 없다. 벨소리처럼 촐랑대지도 않는다. 날 허둥대게 만들지도 않는다. 가만히 바라다보기만 해도 커다란 위안을 주는 나무들. 너랑 나랑 함께 늙어가는 유대감을 보여주는 듯 나무들은 잎들을 떨구고 내게 침묵의 말을 건넨다.
 
그들과 함께 말러의 사랑의 시를 듣는다는 것은 행운이다. 또 있다. 남편 컴퓨터와 내 노트북이 뚝 떨어진 방에 각각 있다는 것은 더더욱 행운이다.
 
[2011년 12월 19일 26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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