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조선일보에 글을 올려보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11월 초 조선일보 구독을 끊어 버렸다. 균형 있는 이성적 보도를 외면하고 국민들 감정을 자극해 광장으로 끌어내는 데에 앞장서고 있어서다. 작금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 뇌에 남아있는 의문은 이렇다.
왜 모든 언론이 합심하여 한쪽으로 쏠려 뭔가 이루려고 할까 왜? 어떤 이는 이를 ’언론의 亂‘ 으로 표현했다. 내 생애 처음 보는 사건이다. 신문 방송을 습관적으로 보면 그들이 말하는 대로 함께 화가 나고 감정적이 되어 버린다. 차분히 이성을 찾기 위해 나는 티비를 안 보게 되었다.
그럼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언론의 도움 없이 국민으로서 나도 민주주의에 참여할 수 있을까. 스위스 인들이 자주 투표에 참가하는걸 보았다. 직접민주주의라 했다. 이 다리를 세워야 하냐 말아야 하느냐는 문제부터 몰려오는 난민을 어찌할까, 전 국민에게 월 3000 프랑씩 나누어 주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스위스는 투표도 노는 날 한다. 누가 어디에 투표하라는 방송도, 표어도, 토론도 없다. 늘 있는 일처럼 이번 투표의 내용에 관한 동네신문이 올뿐이다. 티브이 토론도 없고, 벽보나 선전물도 없다. 모두가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마음속으로 자기 뜻을 정한다.
자그마한 스위스 마을 동회 건물 문에 아예 투표함이 달려있는 걸 보았다. 1990년대 이후 세계에서는 국민발의, 국민투표 등 국민 직접참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1991년~2006년까지 스위스에는 585번 국민투표를 한 반면, 미국 100건, 아프리카 64건, 아시아 40건, 대양주 31건, 유럽 235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무했다. SNS가 발달하고 소통이 잘 되어서일까? 우리나라도 국민발의 제도가 있지만 잘 시행되지 않고 있다. 대신 떼법이 만연해 있다. 국민 천만 명만 동의하면 국회혁신도 할 수 있고,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에 대해 반대의견을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직접민주주의인 국민발의에 해당되지 않을까?
그렇담 우리나라는 세계 최상위 수준의 소통수단이 있어 다행이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체제 아래 법치국가이다. 언론이 선동한다고 감정에 북받쳐 거리로 내닫지 말고, 차분히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기 의사를 표현해 볼 것을 권한다. 나는 백악관 사이트에 들어가 독도문제, 동해 표기 문제에 대해 청원해 본 경험이 있다. 언론도 정치도 좀 더 성숙된 태도를 보여주길 희망해 본다.
[2016년 12월 23일 제83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