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구석기시대가 있었다는 게 증명된 것은 1978년이되어서다. 그 이전까진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가 없었다고 학계에서 주장했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배운 것들이 다맞는 것은 아니었다.
1978년 어느 날 동두천에서 미군으로 근무하던 청년 그렉 보웬은 한국인 여자 친구와 한탄강변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 때 그렉의 눈에 어떤 돌이 들어왔다. 그의 눈엔 구석기 시대의 주먹도끼(handaxe)인 듯 했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 미국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다 왔다. 곧 한국 고고학계에 알렸고, 이어 세계고고학계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보통사람들 눈에는 평범한 돌에 불과한 것을 하필이면 고고학을 전공하던 미군 청년의 눈에 들어온 이래 이 돌은 한반도란 무대에 구석기 시대를 등장시켰다. 이후 개발이란 이름하에 대한민국의 땅들이 파헤쳐지는 일이 생기자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이 무더기로 햇빛을 보기 시작했다.
보웬이 아니었더라도 구석기 시대의 존재가 알려졌을까?
한반도엔 70만 년 전에 구석기시대가 존재했다. 주먹도끼는 끝은 뾰족하지만 손으로 쥐는 부분은 뭉툭해서 손으로 쥐고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도끼 형태의 뗀석기이다.
양면석기라고도 한다. 몸돌의 양쪽 겉면을 크게 떼어내고 가장자리 부분을 다듬어 날을 만드는 것이 특징인 석기다. 양면석기는 전기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구석기인들은 두발로 걷고 사냥이나 수렵으로 먹고 살았다. 동굴이나 바위틈에서 살다가 좀 더 나은 곳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구석기 시대에서 바로 신석기 시대가 이어지는 게 아니었다. 구석기 시대는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돌을 갈아서 쓰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다.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6,000 B.C 에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8천 년 전의 일이지만 700,000 B.C 구석기 시대에 비하면 신석기 시대는 불과 8천 여년 전의 일이니 지금과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인간이 생존한 70만년 한반도 역사에서 구석기 시대가99%, 그 후 신석기시대부터 오늘까지는 겨우 나머지 1%에 해당하는 셈이다. 구석기 시대의 존재가 기정사실이 된 오늘날 불과 30여 년 전 그 증거가 무더기로 발견된 연천에서는 매년 구석기시대 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 축제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미국인 그렉 보웬이다.
그는 한국서 주먹도끼와 한국인 아내를 얻은 것이 생애 최고의 기쁨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미군 공군으로 베트남전에도 참전했었다. 나는 보웬을 알아보려 인터넷에 들어갔다가 그가 57세에 아리조나에서 타계했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이른 나이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생전에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 박물관 개관식 리본 커팅에 초대 받아 자랑스런 발견의 땅 한국에 오기도 했었다.
남한을 북한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미국인 학생을 징집해서 휴전선에 배치한 역사가 남북한 대치를 초월한 인류공동의 역사를 밝힌 셈이다.
[2016년 5월 25일 제76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