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이야기 <10> 부평동 깡통시장
‘외제골목’ ‘도깨비시장’ ‘도떼기 시장’ 이름도 다양
한국전쟁이후 미군 깡통음식 반출‘깡통시장’으로
물건너온 제품‘불타는 세일’중 … 빈티지 상점도 빼곡
한국전쟁이후 미군 깡통음식 반출‘깡통시장’으로
물건너온 제품‘불타는 세일’중 … 빈티지 상점도 빼곡
깡통시장이 정확히 어디냐는 질문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글쎄, 남포동이나 부평동 어디쯤인 것 같은데 거기는 국제시장이던가. 아니면 도깨비 시장이던가? 그것도 아니면 같은 곳이 이름만 다르게 불리는 건가?
명쾌한 답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고 다들 알쏭달쏭 어림잡아 거기쯤이라고만 이야기 한다. PIFF광장으로 가는 길을 경계로 깡통시장과 국제시장으로 나뉜다는의견이 가장 많다. 깡통시장. 부산 중구 부평동 부평시장 수입제품 골목을 이르는 말이다. '외제골목'이라 하기도 하고 '도깨비 시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주 오래 전에는 국제시장과 통칭해 '도떼기 시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깡통시장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어원은 한국전쟁 때 시작됐다. 부산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부대에서 통조림 등 깡통 음식들이 반출된 것이다.
이 깡통 물건들을 난전에서 사고팔았던 것이 바로 깡통시장의시작. 그러다 베트남전 귀환 병사들이 미군전투식량(속칭 씨레이션) 등을 반입하면서 시장이 더욱 활성화 됐다. 고향을 잃은 난민들과 가난한 이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곳, 고난과 격동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껴안고있는 부산 역사의 가슴 아픈 산실.
현재 3개 블록 400여개의 점포가 각종 수입제품들을 판매하고 있는데, 부산의 필수관광코스일 만큼 물건의 종류도 많고 그만큼 볼거리도 많다. 일제, 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인도, 중국, 태국, 심지어 남미 인디오들의 수공예품까지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깡통시장의 묘미다. 좁은 골목길을 비집고 시장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눈길을 끄는 물건들이 한 둘이 아니다. 화려한 장식품들이 번쩍이는 가게를 지나 빈티지 옷이 빼곡히 걸린 상점을 돌아서니, 세상의 모든 과자를 다 모아놓은것 같은 외제과자점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가게든 물건은 넘칠 듯 쌓여있고, 어디로 눈을 돌려도 신기한 구경거리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좁은 골목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한걸음 한걸음마다 색다른 물건들에 발이 매이고, 그래서 깡통시장은 언제나 정체 중. 시장골목의 초입부터 발길을 끄는 것이 있으니, 바로 팥죽이다. 골목 가운데에서 여러 집이 쪼르르 붙어 팥죽을 끓이고 있는 모습은 요즘 젊은이들에겐 신기하고 재밌는 풍경일 것이다.
깡통시장에 들르는 관광객이면 다들 한 그릇씩 먹고 간다고. 팥죽위에는 콩가루에 굴린 인절미가 뜨끈하게 몸을 풀고, 주인아주머니는 연신 “더 주까? 더 주까?” 하며 인절미와 팥죽을 내민다. 입가심으로 시원한 식혜까지 먹고 나니 골목입구부터 속이 든든한데, 여기에 후한 인심까지 더해지니 마음도 든든하다.
깡통시장의 먹을거리로 또 하나 놓칠 수 없는 것이 어묵. ‘부산오뎅’의 고장답게 어묵은 부산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먹을거리이지만, 여기 깡통시장에 나란히 위치한 ‘환공어묵’과 ‘미도어묵’이 부산 어묵의 양대 산맥 되시겠다.
어묵의 모양이며 크기,종류도 각양각색. 어묵은 냉동보관하기도 편리하고 요리의 폭도 넓어 많은 사람들이 한 봉지 가득 담아가고 있었다. 얼마치 달라 하면 알아서 종류별로 담아주는데, 이건빼 달라, 이건 넣어 달라, 일일이 요구해도 귀찮아하는 기색이 없다.
별도로 판매되는 어묵탕 분말 스프도 인기 있는 상품. 이 외에도 비빔당면이 간장 조린 달큰한 냄새로 코를 자극하는가 하면, 당면으로 유부를 채운 유부주머니, 떡볶이, 씨앗호떡, 튀김 등 깡통시장은 군것질의 천국이다. 골목에 들어서는 시작부터 유혹을 이기지 못해 먹다간 나중에 등장할 별미들을 놓칠 수 있으니 자제심이 필요하다.
깡통시장에서 외제과자를 빼면 또 섭섭하다. 미군부대의 통조림 음식으로 시작한데다 외제 물건들을 팔면서 유명해진 시장 인 만큼, 흔하게 볼 수 없는 외국 과자들이 깡통시장에는 많이 보인다.
낯선 미국 과자들도 보이고, 한편에선 일본서 물 건너 온과자들이 ‘불타는 세일’ 중이다. 이것저것 맛보려는 마음에 많은 과자를 종류별로 사가는 사람도 심심찮게 보인다. 과자를 좋아하지 않아도 생소한 과자들이 다양하게 진열된 것을 보고 있으면 하나쯤 집어 들고싶은 마음이 인다. 골목을 굽이굽이 들어가다 보니 곳곳에 옷가게들도 흔하게 눈에 띤다.
재밌는 것은 이 옷들의 진열 방식과 가격. 마네킹을 갖추고 옷을 진열한 가게도 간혹 있지만, 대체로 이곳의 옷들은 ‘쌓여’있고 ‘겹쳐’있다. 바닥에 비닐을 깔아놓고 옷을 ‘쏟아놓은’ 가게도 있다. 손님들은 이 옷더미들을 뒤적이며 숨겨져 있을 보물을 찾는다.
잘만 건지면 그럴싸한 청바지를 단돈 2천원에 살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옷더미를 뒤지는 여성들의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옷가게와 외제품이 즐비한 골목에서 방향을 틀자, 이번에는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시장’이 나타난다. 일본 과자와 인도산 스카프를 파는 가게에서 한걸음만 떼면 꼬막과 생선, 채소나 반찬 등을 파는 시장이 나타나다니 이것 참 기묘한 풍경이다.
대형마트는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의 규모와 다양성에 시장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주인들이 손으로 척척 얹어놓는 소라며 다시마들을 보고 있으니 확실히 대형마트에서보던 것보다 훨씬 싱싱하고 맛깔나 보인다.
90년대만 해도 워크맨을 비롯한 일제 전자제품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나, 현재는 인터넷 쇼핑몰에 밀려 전자제품은 거의 사라졌다. 밀수된 워크맨을 싼 값에 사기 위해 깡통시장을 헤맨 적이 있는 이라면 그 추억이 아련할 것이다.
이제 밀수품은 거의 사라진 분위기이지만, 정식 통관물이 아닌 상품을 음성적으로 팔았던 시절이 있었기에 아직까지 폐쇄적인 곳이 깡통시장이기도 하다. 사진기를 들고 기웃거리는 이에게 상인들이 보내는 경계의 눈빛도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난민촌 아이들의 양육과 성장의 배경이기도 한 깡통시장.
밀수와 불법, 가난과 고난으로 시작한 시장이니 그 과정에서 겪었을 속 시끄러움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깡통’이라는 이름에 담긴 고난의 역사를 알면 그 무게를 가벼이 보는 이 없을 것이고, 사람냄새 진한 깡통시장 상인들의 애환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깡통시장의 좁은 골목길을 헤매다 보면 그곳에서 부산의 과거를 만나게 된다. 옛 부산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이, 그리고 부산을 만나고 싶은 이라면 깡통시장의 정취를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송나영 기자
[2011년 5월 16일 19호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