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11월 23일

골목이야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타임머신 공간

골목이야기<2> 보수동 책방골목
  
 

 
  양팔을 벌리면 마주 보는 집이 손끝에 닿을듯 말듯 한 좁은 골목위로 하늘이 쏟아집니다.

 시나브로 어둑어둑해지는 사방으로 뽀얀 전등빛이 눈처럼 나리고, 싸아한 바람이 골목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목도리를 칭칭 동여맨 여학생들이 급하게 무슨 책인가 찾습니다.
 
 아, 학원생이 책을 바꾸러 온 모습도 보이네요. 교재를 잘못 사간 모양입니다. 큰 길을 마다하고 부러 이 골목을 지나치는 듯한 청년이 휴대전화를 하며 어디론가 총총 사라집니다.
 
 굳이 이곳에 볼일이 없는 사람도 문득 짙은 책향이 그리워 한번쯤 들러 걸어보고 싶어지는 곳, 겨울길목에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았습니다.
 
 "군자가 그 몸을 마칠 때까지 하루라도 폐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독서일 것이로다. 그러므로 선비가 하루라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낯빛과 눈빛이 단아하지 못하고 말씨가 아름답지 못하니 장기나 술 마시는 따위를 애초부터 어찌 즐겨하리오. -연암집-"
 
 "학문은 물을 거슬러 가는 배와 같아서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가느니라. 빨리하려하면 이루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면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논어-"
 
 여기서부터 책방골목
  빼곡이 쌓인 책더미속이 답답했던 걸까.
  "날좀 봐주세요." 넓적한 바닥위에서 활자들은 새롭게 태어난다.
 
 골목 바닥 곳곳에 또렷이 박히어 존재감을 알리는 성현들의 가르침이 문득 우리가 잊고 살던 것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자세히 보니 명언이나 격언만이 아니라 유명한 책 제목도 있고, 아무개의 이름도 박혀있다.
 골목 바닥 곳곳에 또렷이 박히어 존재감을 알리는 성현들의 가르침이 문득 우리가 잊고 살던 것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자세히 보니 명언이나 격언만이 아니라 유명한 책 제목도 있고, 아무개의 이름도 박혀있다.
 
이처럼 대청사거리와 보수동 사거리 중간 지점에 책방골목을 알리는 이정표들은 허공의 간판이든 별도로 설치한 입간판이든 도로 바닥의 갖가지 표식물이든 다양한 모습으로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굳이 '여기서부터 책방골목'이라는 바닥의 글을 눈여겨보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보수동 책방골목은 큰 도로변 입구부터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이 이정표역할을 대신 해준다. 책더미가 벽이고 경계이고 간판이고 장식인 곳, 보수동 책방골목은 있는 그대로가 문화이고 전통이며 역사인 곳이다. 그래서 더욱 정감이 간다.
 
 
책방골목 사람, 사람들 
 부산지역 변두리에서 20년 책방을 운영하다가 이곳으로 온지 10여 년차인 올해 30년경력의 책방 운영자, 김수현 할아버지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할아버지는 건물내 책더미 속으로 난 계단하나를 사이로 윗 점포와 도로변 점포를 오르락 내리락하며 영업을 하고 있다. 자세히 보니 책방골목 안쪽과 이어지는 재미난 건물구조다.

도로변에 7평, 10평, 골목안쪽으로 문이 난 점포 10여 평 공간까지 고만고만한 코너 여러 개를 한집처럼 운영하고 있는 김할아버지는 희귀본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 멀리 서울에서부터 찾아오는 고객들이 많단다.
 
해병대관련 정보가 망라된 비매품 '해병대 전사' 서적과 홍길동전 배비장전 등 한국고전 문학 원본 60여권을 소장하고 있어 나름 어깨가 으쓱하다.
요즘 구하기 힘든 수십년전의 초등학교 교과서도 있다.
  
 "이것보세요. 이런 거는 어디가도 없어요. 부르는 게 값이라니까요. 돈이 될라믄 이런 희귀본을 마이 갖고 있어야 된다이까네요." 사투리가 정겨운 김할아버지는 먼지를 털어내며 누렇게 빛바랜 고서들을 펼쳐보였다.
 
혼자서 윗칸 아랫칸 번갈아 뛰어다니며 고객을 놓칠세라 동분서주하는 할아버지는 늦도록 간판을 내리지 않았다. 이곳 책방골목은 오전9시부터 오후 8시까지 공식적인 근무시간이지만 개인별 차이는 있다.
  
요즘같이 으스스한 겨울철엔 저녁 7~8시경 일찍 문을 닫는 점포도 있지만, 대부분 마감시간을 지켜 골목의 불은 늦은 시간까지 환하다.
요즘같이 으스스한 겨울철엔 저녁 7~8시경 일찍 문을 닫는 점포도 있지만, 대부분 마감시간을 지켜 골목의 불은 늦은 시간까지 환하다.
 
매월 첫째 셋째 일요일은 정기휴일이지만 매년 2월~4월 신학기 시즌에는 휴일없이 정상영업을 하는 게 이곳 책방골목의 철칙이기도 하다. 나이 이십대후반에 서점과 인연을 맺어 올해로 서점 경영 30년째라는 배순한씨도 이곳 터주대감이다.
 
전문서적 외국원서 등을 취급하는 월드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평생을 책과 함께 하면서 책을 팔아 자식들 바라지를 해왔다.
 
그런 배씨가 요즘 어린 학생고객들을 접하면서 세월의 비애감과 달라진 세태와 문화에 씁쓸함을 느끼기도 한다고. 예전만해도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일반 점포 영업자들과 달리 인텔리 취급도 해주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도 드물었지만, 요즘이야 여느 장사치와 다를 바 없는 시선이 대체적인데다, 함부로 대하는 소비자들을 접할 때마다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평생직업이지요 뭐. 이걸 관두고 나가서 뭘하겠나 싶어 쉽게 딴 일도 못하겠더라구요. 잘되든 안되든 나름의 노하우로 평생 책과 함께 살다 가는 거지요 뭐." 그나마 배순한 대표는 아내와 함께 번갈아가며 서점을 운영하고 있어 효율적인 시간관리가 가능한 편이다.
 
때로는 수백만원이 훌쩍 넘는 원서를 현금으로 어렵게 대량 구입해와 비치해두기도 한다는 그가 지금껏 경쟁에 밀리지 않고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차별화된 영업비결과 전문서적만을 취급하는 노하우 때문이다. 이루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확보해놓은 각 분야 전문서적들이 빼곡한 책장은 외국 전문 서점을 방불케 한다. 
  
 
배씨는 어렵게 구입한 책들을 가끔 인터넷에 올려 통신판매하거나 서신을 통해 기업이나 학교연구실 등에 지를 보내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문화골목
현대화된 도로바닥과 간판에 예술을 덧입힌 그래피티로 문을 내린이후에도 삭막치 않은 책방골목.
 
더 이상의 보수는 이곳을 오히려 낯선 공간으로 만들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곳 책방골목 운영자들은 나름 바람이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편안히 장사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골목 양쪽 점포에서 쳐놓은 차양막이나 간이 지붕 따위가 있긴 하지만, 비가 오면 고객들의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건너편 가게의 책에 스며들어 버리기 일쑤기 때문에 골목전체를 돔형태로 가려주는 터널식 지붕이 하루빨리 설치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점포주 대부분 세입자들이라 관할구청에서 아무리 보조를 해준다 해도 비용을 보탤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느 골목이나 마찬가지지만 빗물이나 오폐수가 지나는 길목이기도해 가끔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악취 때문에 몸살을 앓기도 한다. 어쨌거나 책방골목은 여전히 매력이 넘친다. 낯익은 풍경처럼 익숙한 골목엔 여전히 미소가 흐른다.
 
 "이젠 더 이상 핫초코는 엄서요." 문 앞에 세워진 이상야릇한 입간판에 발걸음이 절로 멈춘다.
 
 누군가 머물다 메모를 남긴 포스트잍마다 가득한 사연이 인상적인 로스터리 카페, '인앤빈(人 & bean)'은 확트인 유리창 너머로 주머니사정이 넉넉지 않은 사람들도 안심하고 들어갈 수 있을만큼 저렴한 메뉴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소한 커피향에 이끌려 걸음이 멈출무렵 추위에 떨던 사람들은 짧은 시간 갈등을 하게 마련. 그 옆으로 살짝 붙어있는 분식점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따끈한 오뎅국물의 유혹을 멀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적당히 넓은 광장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살아있다. 주택과 가까이 있어 그야말로 이곳 주민들의 생활공간 일부이기도하다.
 
최근 도로를 정비하면서 골목도 한층 말끔해지고 주변시설도 세련되어졌지만 여전히 이곳 골목만큼은 역사가 있고, 추억이 있고, 문화가 있는 향수짙은 곳이다.  그것이 곧 이골목의 매력이기도하다.
 
 수 십년 수 백년 쾌쾌묵은 희귀본에서부터 갖가지 헌책과 새 책이 공존하는 이 골목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어울림의 문화가 있다.
 
책방골목, 그 역사속으로
 1950년 6.25 한국전쟁이후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을 때 이북에서 피난온 손정린씨 (구 보문서점)부부가 보수동 사거리 입구(현재 글방쉼터) 골목안 목조건물 처마 밑에서 박스를 깔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헌 잡지, 만화와 고물상으로부터 수집한 각종 헌책 등으로 노점을 시작한 것이 이곳 책방골목의 시초다.
 
 그 세월이 어언 60여년. 옆으로 뒤로 바이러스처럼 퍼져 이곳 전체골목 350미터(직선거리 140미터)를 점처럼 빼곡이 점포를 형성하며 들어서기까지 책방골목은 한결같은 모습을 지켜왔다.
 
 이제 전통문화의 거리로 중구지역을 넘어 부산을 대표하는 골목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책방골목은 민족의 아린 역사와 함께 해왔기에 더욱 마음이 가는 명소다.
 
피난민들이 겨우 부산에 정착, 어려운 삶을 이어가고 있을 때 부산소재 학교는 물론 피난 온 수도권의 학교들까지 구덕산 자락 보수동 뒷산 등에서 노천교실 천막교실에서 수업을 하게되면서 이곳 보수동 골목길은 한때 학생들로 넘쳐났다. 
 
당시만 해도 너나할 것 없이 어려운 시절 많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공부를 하고 싶어도 책을 구입하기가 어려웠고, 그나마 이곳 책방골목에서 헌책이라도 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늘어나는 수요에 맞추어 노점 헌책방은 성황을 이루었다. 차츰 다른 피난민들도 가세해 책방사업에 손을 뻗쳤고, 이 무렵 한동점씨(대륙서점). 박이준씨, 김외갑씨 등이 가세하면서 하나 둘 노점과 가건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50여 점포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60~70년 대에는 70여 점포가 들어서 명실공히 부산의 대표적 문화골목 역할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곳 책방골목은 당시 생활이 어려운 피난민과 가정 형편이 어려운 수많은 학생과 지식인들이 귀중한 책을 내다 팔거나 사거나 저당 잡히기도 했고, 신학기가 되면 책을팔고 사고 교환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곳곳마다 넘쳐나는 책 보따리는 가관이었다는게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추억이다.
 때때로 개인이 소장한 값진 고서도 흘러 들어와 많은 지식인 수집가들의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이곳은, 가족을 이별하고 피난 온 이산가족들에겐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였고, 청춘 선남선녀들이 추억을 쌓아가던 장소이기도 했다.
 
 이런 책방골목이 요즘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근래에 와서 경제 발전으로 새 책의 수요도 대폭 늘게 되면서 새 책방도 많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전문서적, 아동 서적 등 각종 양서를 구비하기 위해 일부러 이곳을 찾는 전국의 소비자들도 부지기수다. 요즘이야 인터넷의 발달로 점포마다 특색 있는 전략으로 온라인 매매도 이루고지고 있다하니,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균 30년이상 운영해온 책방의 고수들이 대부분인 이곳 점포운영자들은 수십년 책방운영의 노하우로 일반서점이 구하기 어려운 전문서적이나 희귀본을 손쉽게 공급해 오늘날까지 책방골목의 명성을 이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책은 살아야 한다' 생존 그리고 축제
 이곳 책방골목에서는 매년 가을 문화행사도 열린다. 지난 2005년이후 지금까지 매년 9월 '책은 살아야한'는 슬로건으로 보수동 책방골목의 역사성과 문화장소로서의 기능, 지역경제활성화 도모차원에서 책과 어우러진 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연극, 포퍼먼스, 고서전 등 거리 퍼레이드와 전시 각종 문화공연, 도서무료교환, 불우이웃돕기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행사로 책방골목의 부흥과 활성화를 도모하기도 한다.  내년 즈음 이곳 보수동에 책 박물관과 다목적 창작공간 북카페 휴게쉼터 등의 기능을 갖춘 책방골목문화관이 건립된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크다.
 
 "책은 살아야한다?"
  "책은 살아있다!"
 어둑한 골목안 불빛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책들 사이를 지나치는 방문자에게 책들이 말을 건낸다.
 
유순희 편집국장 
[2009년 12월 23일 2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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