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래의 전우 등영초(鄧潁超 ; 1903~1992)
등영초는 1903년 광서성 남녕에서 청조의 군관인 아버지와 지식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여섯 살도 안된 나이에 아버지를 여윈 그녀는 어머니의 가정교사, 의료봉사 등의 일로 생계를 겨우 꾸렸지만 여의치 못해 더 나은 일을 찾기 위해 두 모녀는 천진으로 이사했다.
그래도 사정은 여전히 어려워서 등영초는 1913년 열 살이 되어서야 겨우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것도 어머니가 북경평민소학교에 근무하게 되면서부터 였다.
이 학교의 교사는 대부분이 중국사회당원이거나 중국 동맹회 회원이었는데, 그
후 신해혁명의 좌절로 이 학교 교장진익룡이 원세개정부에 의해 살해되고 대부분의 교사들도 체포되면서 이 학교는 불과 반년만에 폐쇄되고 말았다.
후 신해혁명의 좌절로 이 학교 교장진익룡이 원세개정부에 의해 살해되고 대부분의 교사들도 체포되면서 이 학교는 불과 반년만에 폐쇄되고 말았다.
결국 두 모녀도 쫒겨나고 말았다. 그 후 등영초는 13세 되던 해 천진직예제일여자사범학교에 들어갔다. 노력형이었던 그녀는 뒤진 학문만회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공부에 열중한 나머지 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회복은 되었으나 그 후 여러 번 결핵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1919년 5.4운동 당시 여자사범에 재학 중이던 16세의 등영초는 위청양, 곽융진 등과 함께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하여 천진여계애국동지회 결성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공사 집회를 막론하고 순회하면서 애국정신을 호소하는 정열적이고 설득력 있는 강연을 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 같은 5.4운동이 청년들에게 하나의 혁명 출발점이었듯이 등영초에게 있어서도 기나긴 혁명생애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또 하나 주은래(周恩來)와 만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남개중학을 졸업한 후 일본 유학중이던 주은래는 5.4운동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하여 학생연합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1919년 등영초를 포함한 천진의 진보적 학생 20여 명과 함께「 각오사」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아나키즘을 위시한 사회주의 등 당시의 신사조(新思潮)를 연구하고 토론하였으며 여성문제,결혼문제도 논의의 주제로 삼았다.
그러나 천진 당국의 탄압으로 각오사는 부득이 지하활동을 하게되었고, 1920년 주은래 곽융진 등이 체포당하자 그 활동도 사실상 정체되었다. 등영초는 24명의 학생과 함께 주은래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그들 대신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제의하는가 하면 5.4국치기념회 참가에대한 학교 당국의 반대에 항의하여 일주일간 전원 동맹휴학의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후「 각오사」는 소년중국학회등 4개 단체와 함께「 개조연합전선」을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을 결정하였고, 주은래는 일하면서 배우기 위한 고학을 결심하고 프랑스 유학 길에 올랐다.
그러나 등영초는 북경의 사립학교 교단에 선 최초의 여교사가 되었으나 두가지 고뇌가 있었다.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유학을 떠날것인가 아니면 직업을 잃은 어머니를 위해 생활을 꾸리며 구습대로 결혼을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일단은 유학을 포기하고, 교사보다 보수가 나은 은행에 취직하기 위해 낮에는 교직에 있으면서 밤에는 부기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결핵이 도져 그 꿈도 무산되고 말았다.
1920년대 천진시절 등영초는 특히 여성 운동에 힘을 기울이며 자기 변혁을 시도했다. 그녀는 여권운동 동맹회 지부를 성립시키고 애국운동을 되살려 여성잡지도 출판하였다. 또한 한때 두절되어 있던「 각오사」의 동지들과도 다시 연락을 취해 그들의 사상형성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는데, 특히 유학중인 주은래등으로부터 전해지는 유럽의 정황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확신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도 주은래와의 많은 서신왕래를 통해 더욱 서로의 애정이 깊어지고 있었다. 1924년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으므로 등영초는 조직의 결정에 따라 국민당에 가입하였고 국민당당부여성부장이 되었다.
주은래도 9월에 귀국하여 광동에있는 황포군관학교의 정치부주임이 되었다. 등영초도 양광(兩廣)지구 여성운동을 담당하게 되어 광동으로 갔다. 그해 가을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야말로 이들의 결혼은 혁명과 사랑을 함께 한 진정한 동지적 결합이었다. 혁명의 발원지 광동에서 등영초는 하향응 등과 여성운동을 지도하여 국민당 제2차 전국대회에서 국민당중앙위원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27년 4.12 반공쿠데타로 국공합작이 완전히 결렬되면서 공산당은 큰 타격을 받았고, 그 당시 등영초는 백색테러의 공포 속에 숨어서 첫 아이를 낳았으나 난산으로 사산한 후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모친과 탈출하였으며 주은래도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탈출에 성공할 수있었다.
그 후 이들 부부는 갖은 고난 끝에 1932년 강서 소비에트 근거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공산당은 1934년 혁명 근거지를 포기하고 연안까지 2만 5천리 대장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그녀는 또다시 결핵이 재발하여 심한 각혈을 하는 등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결국 끝까지 30여 명의 여성 간부가 속해있는 제1방면군의 한 사람으로 장정대열에 참가하여 서금을 출발하였다.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으며 추격해오는 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대도하,대설산,대초원을 병약한 몸으로 행군을 계속하자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생명력은 끈질겨죽지 않고 살아 장정을 마친 뒤 1937년 결핵요양을 위해 북경교외의 서산으로 갔다. 곧이어 노구교사건이 터지자 서산도 위험하였는데, 다행히 그 당시『 중국의 붉은 별』이란책을 마무리하고 있던 에드가 스노우와 만나 등영초는 그의 하녀로 위장하여 무사히 서안까지 갈 수 있었다.
항일기간 중 그녀는 전시고아구제회 일과 아동보육소 건설에 힘을 다했고 여성지도위원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46년 정치협상회의에서 공산당의 7인 대표 중 유일한 여성대표로 선발되었다.
인민공화국에서는 여러 국가요직을 역임하였다. 주은래.등영초 부부의 동지적 결합은 그들의 사후에도 많은 일화를 남겨 듣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 이들 부부는 단 한 명의 자식도 갖지 못하였지만 순국한 혁명동지들의 자식을 7명이나 양자로 키웠으며 둘 다 특이한 유언을 남겼다.
1976년 78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친 주은래는 그의 유언장에서 추도식을 크게 벌이지 말 것과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하늘에 뿌려줄 것과 미망인 등영초는 아내로서 보다 전우로서 추도식에 참석해 줄 것을 당부했고, 책, 문서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당에 기증한다고 했다.
등영초 또한 1992년 89세를 일기로 타계하면서 남긴 유서에서 유해는 의학용으로 해부한 뒤 화장하고, 뼈는 보관하지 말고 뿌려 없앨것이며, 자신의 저택은 기념관으로 사용하지 말고, 친인척에게는 어떠한 혜택도 주지 말도록 하며, 수의도 새로 만들지 말고 30여 년간 입던 낡은 옷을 그냥 사용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특히 “추도식 같은 것은 삼가해 주십시오. 이것은 먼저 간 은래 동지와의 약속입니다.” 라고 썼다. 물론 모든 것은 그들의 유언대로 시행되었다. 주은래와 등영초 동지는 그들의 깨끗한 사생활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2011년 9월 16일 23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