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사랑한 혁명 정치가 송경령 (1893~1981)
송씨 집안의 세 자매의 생애는 파란만장한 인간드라마일 뿐만 아니라 중국 혁명과 20세기의 역사에 남을 귀중한 증언을 함축하고 있다.
송애령(공상희 부인), 송경령(손문 부인),송미령(장개석 부인)의 아버지 송가수는 해남도의 가난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나 어릴때, 보스턴에서 상업을 하는 친척의 양자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장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 곳을 도망쳐 나와 전전하다가 독지가의 도움으로 공부하게 되어 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1886년 귀국하여『 만국공보』의 발행인으로 유명한 영 알렌 밑에서 기독교 전도사로 일했지만 알렌의 권위적인 태도에 불만을 느껴 독자적인 전도활동을 하기 위해 사임했다.
그 후 그는 상해에서 제분공장과 인쇄소를 경영하는 부르주아로 성장하였고 한편으로는 일찍부터 손문의 혁명활동을 지원하였다. 어머니 예계진은 그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여자중학까지 졸업했다.
대대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기 때문에 미션계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복음주의자로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아낌없는 도움을 주는 여성이었다.
가정교육은 상당히 엄했지만 장녀인 송애령과 동생 송미령은 꽤 활달했고 송경령은 내성적이며 온순했다고 한다.
세 딸은 모두 전족을 하지 않았으며 기독교계통의 중학을 졸업하였다.애령은 미국 유학을 한 최초의 중국여성이었으며 몇 년 후인 1908년경령과 미령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경령은 웨슬리안 여자대학 철학과에 진학하였다.
경령은 대학시절 학교잡지에「 유학생이조국 중국에 미치는 영향」,「 20세기 최대의사건」,「 현대중국의 여성들」 등 여러 편의글을 실었다.
여기서 그녀는 “자유와 평등의 기반이 되는 박애를 실현하는 것이 20세기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하늘의 반쪽을 지탱하는 여성, 이 여성을 소외시킨 인류사회의 발전은 존재할 수 없다.”는 등의 주장을 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녀의 생애를 관철하고 있는 사상과 행동의 원류를 찾아 볼수 있다.
1913년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한 송경령은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원세개의 반혁명적 통치로 그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아버지와 언니를 다시 만나 기쁨을 나누고 다음날 손문을 방문하였다.
경령은 손문에게 혁명활동을 돕고 싶다는 의사를 표하였고, 곧이어 언니가 결혼하게 되자 언니가 하던 손문의 영문비서 일을 도맡아하게 되면서 손문을 보필하게 되었다. 늘 영웅으로 숭배하던 손문 곁에서 일하면서 경령은 그의 강인한 불굴의 의지와 혁명원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효율적인 사무능력과 어학력 그리고 그녀의 순수한 조국애에 손문은 위안과 감동을 받으며 두 사람은 열정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합에는 여러 가지 장애가 놓여있었다.
27년이라는 큰 연령차이, 손문의 본부인과 3남매 또한 경령 부친의 강력한 반대와 주변의 수군거림...... 그러나 1915년 가을 두 사람은 난관을 무릅쓰고 결혼하였다. 손문의 나이 49세, 경령의 나이 22세였다.
송경령은 훗날 에드가 스노우에게 그때의 감정은 연애라기보다는 구국운동을 돕고자하는 마음이었으며 손 박사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의 공동의 이상은 '세대차이 '의 간격을 메울수 있었으며 혁명투쟁 속에서 서로를 평가하고 재발견하였다. 손문과의 결혼생활 10년은 송경령에게 있어서 정치를 익히고 혁명을 배우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그녀는 손문만년의 중요한 시기에 정치적사 고와 행동에서 모든 것을 그와 함께 하였으며 또한 손문만년의 정책이나 주의 (主義)에 그녀의 영향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25년 3월 손문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자 지도자이며 스승이며 동지였던 손문을 잃고 홀로된 경령의 나이 32세였다.
손문 사후 송경령은 주저앉지 않고 손문의 삼민주의와 반제국주의 노선을 견지하면서 독립된 혁명정치가로서 자립하였다. 이후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국민당 좌파로서 무한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의 4·12 반공쿠데타 이후 무한정부의 붕괴로 이어진 반혁명적 사태에 직면하여 송경령은 손문과 장개석 사이의 이념적 단절은 통감하고 국민정부와 결별한 후 모스크바로 정치적 망명을 떠났다.
이후 모스크바와 베를린에서 가난하고 힘든 망명생활 중 장개석과 형제자매의 유혹을 뿌리친 채 혁명사상을 공부하며 로맹 롤랑, 죠지 버나드 쇼 등 세계적 반전·반파시즘 인사들과 교류하며 국제회의에 참가하였다.
1931년 귀국 후 만주사변이래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한 국내저항운동과 국제적 반제국주의, 반전·반파시즘 활동과 연계하여 반장(反蔣) 민권운동과 항일민족통일전선형성에 주력하였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 국 공내전을 거치면서 장개석 국민당의 반민중적 정책에 반대하여 그녀는 끝내는 중공정권 건설에 합류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성립 후에는 국가 부주석, 전국부녀연합회 명예주석 등 정부요직을 역임하며 여성과아동을 위한 평화복지사업에 헌신하였다.
송경령은 손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좌경화 하였는데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사상을 결합시킨 기본적 사고는 청년시기부터 만년까지 그녀 사상의 저류가 되었던 민족주의와 민주·박애사상이었다. 이것은 그녀의 민권운동, 여성운동, 사회복지활동까지 포괄하고 있었다. 송씨 집안의 세 자매는 같은 성장환경과 교육적 배경을 가졌으면서도 각자 매우 다른 사상적 노선과 삶의 형태를 가졌다.
언니 애령은 중국의 경제를 좌우한 거만의 부를 지녔으며 동생 미령은 장개석과 결혼함으로써 중국의 거대한 권력을 탐하고 쥐었으며 경령은 끝까지 민중 편에 서서 손문의 삼민주의 원칙과 정책을 지키고 발전시키고자 외롭고 험난한 길을 걸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주관적 요소로서, 자아의 성향이 그 인물의 발전과 사회적 역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송경령은 중국의 미완성 혁명의 양심이다.”라고 한 에드가 스노우의 말이나,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위축되지 않고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모든 복잡한 정치상황에 직면하여 맞서나갈수 있었다.”고 한 해롤드 아이작스의 말이나, “그녀는 모든 기간 동안 그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싸웠으며 그녀가 한 모든 행동은 그녀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킨 것이었다.”고 말한 님 웨일즈의 말은 송경령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송경령은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어떤 보편적인 진리를 이성과 양심에 따라 실천해 나간 매우 용기 있는 훌륭한 여성이었다.
<송경령 손문 결혼사진>
<세자매>
<송경령과 손문>
<상해의 손문 송경령 고거>
[2011년 7월 15일 21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