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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성이야기

엄동에 피어난 홍매같은 열정의 혁명가

 
하향응(何香凝 ; 1878-1972)
 

하향응은 서태후 치하였던 1878년 홍콩의 부유한 차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억척스러움이 남자형제를 능가할 정도여서 그녀의 어머니는 하향응을 정숙한 처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라도 전족을 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天足한 여성투사를 동경하던 하향응은 어머니가 아무리 전족을 시키려 해도 완강히 거부하여 모두가 잠든 틈을 타서 발을 싸맨 베를 풀어 버리곤 하여 결국은 어머니도 포기하고 말았다.
 
또한 여자는 글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자 부모 몰래 책을 구하여 보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하녀를 서당선생에게 보내어 알아오도록 하면서까지 배우려 했다.
 
이 억척스러운 큰 발 소유자인 하향응을 오히려 반기며 아내로 맞이한 사람은 요중개(廖仲凱)였다 그는 훗날 손문의 최측근으로 활약한 좌파로서, 미국에서 출생하여 교육을 받았으므로 전족을 하지 않은 여성과의 결혼을 원했다. 하향응의 천족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생애최고의 반려자를 얻게 해 준 셈이다.
 
하향응의 나이 19세, 요중개의 나이 20세되던 해인 1897년 두 사람은 결혼했다. 이들은 금슬이 좋은 썩 어울리는 부부로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함께 책을 읽고 국가대사를 의논하였으며 또한 청조의 부패무능에 격분을 금치 못했다.
 
따라서 “나라의 흥망에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깊이 느껴 1902년 친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향응은 가진 패물을 모두 팔아 요중개를 일본으로 유학보냈으며 그녀도 곧 남편을 따라 도일하였다.
 
그 동안의 풍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버린 그녀는 우선 일본여자대학교에서 일본어 학습에 정진하며 와세다대학 경제예과에 입학한 요중개와 함께 중국인유학생집회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혁명 청년 호한민, 주집신, 추근등과 알게 되었고 이후 서로 격려하며 반청 혁명사상을 싹틔웠다.
 
그러던 중 두사람은 1903년 봄 어느 날 혁명가 손문을 만나게 되었다. 청조를 뒤엎고 민국을 건립해야 한다는 손문의 연설에 감명받고 그들은 혁명 사업에 참가하여 평생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하향응은 1904년 장녀 요몽성을 출산한 후 자식을 친정에 남겨둔 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1905년 동경에서 중국동맹회가 정식으로 발족되자 하향응은 맨 첫 번째 여성회원이 되었다.
 
중국동맹회의 온갖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 하며 하향응은 어떠한 고생도 달갑게 참을 수 있었다. 특히 손문의 지시에 따라 세계 각지의 화교에게 혁명을 선전하는 편지를 써보내 많은 원조를 받아냈다.
 
1906년 그녀는 목백(目白)일본여자대학교육학부에 입학하였고 1908년에는 장남 요승지를 출산한 뒤 이듬해 본향(本鄕)여자 미술학교의 동양화전공 고등과로 전학, 심기일전하여 그림공부를 시작하였다.
 
남편 요중개는 와세다대학을 자퇴하고 중앙대학 정치경제과에 편입하여 1909년 졸업한 뒤 손문의 명령으로 길림으로 건너가 북방에서의 혁명세력 확충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홀로 동경에 남은 하향응은 1911년 봄 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자 어린 두아이를 데리고 홍콩으로 돌아가 광주봉기에 참가하였고 10월 10일 무창봉기의 성공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신해혁명의 성취는 원세개에게 빼앗겨 버리고 손문은 제2혁명에서도 실패하여 다시 일본에 망명한 요중개, 하향응 등 반원세개파 사람들을 결집하여 중화혁명당을 세워 재출발을 도모하였다. 2년 후인 1916년 帝制반대의 민의 속에 원세개정권이 무너지자 즉각 귀국한 손문은 공화국재건을 위해 노력 하 였으며 하향응은 호법운동을 힘껏 지원하였다.
 
1922년 손문의 부하인 진형명이 반란을 일으켜 손문의 심복 등중원이 암살되고 요중개는 감금되었으며 손문부인 송경령은 행방불명이 되고 총독부가 폭파점거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하향응은 먼저 백방으로 노력하여 송경령의 거처를 알아내 영풍함에 피신중이던 손문에게 부인의 안부를 전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60일간이나 감금되어 있던 남편 요중개를 겨우 찾아내자 그녀는 죽을 각오를 하고 진형명 앞에서 “…죽일테면 죽여라 석방할 생각이라면 나와 함께 보내달라!” 고 큰 소리로 외쳤다.
 
몹시 노한 하향응이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자 그 서슬에 놀란 진형명은 요중개의 석방을 약속하였다. 이렇듯 간신히 남편을 구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요중개와의 이별은 또다시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연소, 용공, 노농부조의 기치로 손문이 1924년에 단행한 국민당개조에 반대했던 우파는 1925년 3월 손문이 죽은 후, 요중개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려 그해 8월 하향응이 보는 앞에서 그는 우파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반년도 안된 사이 소중한 두사람을 잃은 하향응은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장례식날 하향응은 자기집 문 앞에 “정신은 죽지 않는다”라고 써 붙임으로써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찬 그녀의 결의를 보여 주었다.
 
1926년 북벌이 진행되어 광동국민정부가 무한으로 떠날 때 그녀도 그곳으로 갔다. 하향응은 매령을 넘으며 눈쌓인 산봉우리에 오만하게 활짝 피어있는 붉은 매화를 보면서 시 한 수를 읊으며, 어떠한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북벌을 완수해야 한다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성공한 듯 보였던 국민혁명도 1927년 장개석의 4.12반공쿠데타로 붕괴되고 1천명이상의 여성활동가가 학살되자 그렇게도 강하던 하향응도 좌절의 눈물을 흘렸다. 무엇 때문에 그리도 열심히 살아왔던가!…실망한 그녀는 요중개와 손문이 잠든 묘소에 찾아가 “열사의 피는 과연 누구를 위해 흘렸던 것인가”라며 비탄에 젖어 울부짖었다.
 
드디어 그녀는 국민당내에서의 모든 직책을 버리고 장개석 국민당과 결별하고는 프랑스로 가서 그림을 그리며 칩거하였으나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곧 귀국하여 송경령과 함께 항일전 지원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장개석이 안내양외(安內壤外)의 정책을 내세우며 일본에 대해 부저항으로 나가자 “스스로 남자라 칭하면서 적에게 굴복하여 싸움도 하지 않고 강산을 넘겨주니 만세치욕이 아닐 수 없도다.
 
우리 여성들이 바라는 것은 전장에 나가 죽는 것이니 우리의 스카프와 치마를 당신의 군복과 바꾸는 것이 어떻겠소”라는 시를 치마에다 적어 장개석에게 보냈다. 하향응은 여성운동에도 많은 업적을 남겨 국민당 초대여성부장을 지냈으며 국민당 제2회 전국대표대회에서「 여성운동결의안」을 발표함으로써 중국여성운동에 획기적인 성과를 이룩하였다.
 
종전후 연립정부 수립을 호소하며 국공내전을 반대하였으나 이 또한 무산되자 결국 중공정권에 합류하였다. 하향응은 인민공화국에서 정협전국위원회 부주석, 헌법기초기원회 위원, 중국전국부녀연합회 명예주석, 화교사무위원회주석, 중국미술가협회 주석 등 중요요직을 역임하였으며 1972년 94세의 천수를 누리고 사망하였다.
 
녀는 특히 호랑이를 주제로 한 동양화에 능했는데, 용맹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힘과 용기를 가진 호랑이를 국민혁명정신의 상징으로 전화시키고 싶은 염원때문이었으며, 생애를 마칠 때까지 그녀는 자신을 “민국13년의 국민당원”이라고 자칭하였다.
 
[2011년 6월 20일 20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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