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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성이야기

“여성의 발을 해방 시켜라” 전족폐지 여권운동

 
<4> 청말의 여성혁명가 추근(秋瑾 1875-1907)
 

1907년 7월 15일 아직 동트기전 고요한 어둠에 싸인 소흥의 헌정에서 불같이 열정적이었던 한 여성혁명가는 비밀리에 살해되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 32세. 추근의 이같이 짧은 생애는 일순간에 밤하늘을 물들이고 사람들에게 경탄과 찬미를 남긴 채 사라지는 불꽃과도 같았다.
 
추근이 여성해방을 호소하고 반청을 부르짖는 혁명 활동에 참가한 것은 인생의 마지막 3년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광휘는 뜻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발분을 금치못하게 하였다. 추근은 1875년 복건제독 추수남을 아버지로 하고 교양이 풍부한 단(單)씨를 어머니로 하여 하문(厦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녀는 오빠를 따라 경사와 시문을 배웠으며 절강성 소흥으로 이주해 와서는 승마와 검술 등 무예도 익혔는데 추근의 재능과 개성을 풍부하게 개화시켜 준 사람은 다름아닌 그녀의 어머니였다.
 
그 후 아버지의 전근으로 호남으로 이사하여 20세가 되던 해 추근은 상담(湘潭)의 부호의 아들 왕자방과 중매로 결혼을 하였다. 남편은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재색을 겸비하고 남자처럼 호방한 추근과는 대조적이었다.
 
상담에서 그녀는 남편과 금슬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가정에 파묻혀 살면서 일남일녀를 낳고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1903년 그녀의 남편이 청조
정부의 호부주사(戶部主事)자리를 돈으로 샀기 때문에 상담을 떠나 북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의화단사건이후 외국군이 침공해 들어와 국가가 나날이 열강에게 침식되고 쇠퇴해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지켜보면서 추근은 구국의 염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남편동료인 영남호의 아내로서 시문도 짓고 서예가로 이름이 있던 오지영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새로운 인생의 길과 생활방식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여자는 학문을 익혀 자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매사를 남자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부르짖는 혁명은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열적이며 생각한 것은 곧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던 추근은 새로운 인생관의 실행을 위해 그냥 가정에서만 머물 수 없었다.
 
“이제까지의 삶은 말이나 소와 같은 노예의 삶이었다. 새로운 학문을 몸에 익혀 자활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은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리라”고 마음먹었지만 남편이 쾌히 승낙할 리 없었다.
 
 
추근은 남편과의 결혼을 이미 후회하고 있었고 마음이 맞지 않는 남편에게 더 이상 순종할 생각도 없었다.과감히 두 아이를 친정어머니께 맡기고 곧장 여비를 마련해서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봉건적인 가정의 끈을 단절한 추근이 동경을 건너간 것은 1904년 여름의 일이었다. 그 당시로서는 일본에 유학한 여학생은 극소수였다. 우선 유학생회관 부설강습소에서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학문을 익혀 자립하고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는 제2의 인생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듬해 4월 아오야마(靑山)의 실천여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잡지『백화보』에「 삼가 중국의 2억 여성동포에게 고함」「, 우리 동포에게 경고함」 등의 글을 게재했다. 그 논문들에서 추근이 주장하고 있었던 요지는 전족(纏足)의 폐해와 교육의 필요성이었다.
 
전족은 근 천년간 중국여성의 기동성과 자유를 억압하였으며, 여성을 성의 도구로 생각하여 작은 발을 만드려는 특이한 관습으로 그 고통과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관습은 청대에 가장 성행하여 전족을 하지 않으면 옳은데 시집을 갈 수도 없었으며 전족은 여자로서 살아가기 위한 신분증명서와 마찬가지였다. 현명하고 현대적이었던 추근의 어머니도 양가규수로 만들기 위해 딸에게 전족을 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추근은 밤마다 헝겊을 풀어놓곤 했는데 결혼한 후엔 아주 방족(放足: 전족한 후 헝겊을 풀어낸 발을 말함. 이에 비해 天足은 전족을 아예 하지 않은 발을 의미함)해 버렸다.
 
이 같은 체험을 통해 추근은 전족으로부터 여성의 발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天足會를 창립하였다. 또한 남녀평등을 주장하여 남존여비의 봉건예교에 반대하였고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강조하고 여성교육을 주장하였다. 중국동맹회가 결성되자 그녀는 곧 동맹회에 가입하고 여권신장과 혁명운동에 노력했다.
 
그당시 유학생들간에 청조타도의 사조가 강력해질 무렵 일본 문부성이 <청국 유학생 취제규칙>을 발표하자 추근은, 일제히 귀국하여 항의의 뜻을 표하자는 강력한 의견을 주장하였다.
 
추근은 혁명가의 길을 선택해 목숨이 다 할때까지 일로 매진하기로 작정하였다. 1906년 귀국한 후 심계 여학교의 교사로 지내면서 여성해방과 혁명사업에 매진하였다.

1907년에는 여성잡지『 중국여보』를 창간하여 여성을 계몽시키고 또한 여성의 연합과 조직을 위한 지표가 되고 등불이 되고자 하였다. 추근은 평등의 대가를 지불하려면 여성도 반청혁명에 참여하여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라에 보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직접 청조타도의 무장봉기에 뛰어들었다.
 
추근은 호남의 유도일 등의 봉기에 호응할 목적으로 대통학당을 거점으로 봉기를 준비했지만 이 일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절강에서 재차 거사준비를 시작했다. 서석린이 안휘에서, 추근이 절강에서 동시에 봉기하고자 한 계획이 그것이다.
 
그러나 믿었던 서석린이 살해되어 버렸으며 곧 이어 그녀 자신도 동료 중 한사람의 밀고로 결국 체포당하고 말았다. 거사가 실패했을 때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었으나 여자도 남자와 함께 민족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정의의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자가 영웅이 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용천(옛 보검)의 날이 운다.”는 씩씩한 기상을 갖고 반청혁명을 위해 몸을 바친 첫 번째 여성열사가 되었다. 추근은 중국근현대사에서 가장 먼저 자각하여 민주혁명과 여성해방을 위해 헌신한 여성이었다.
 
곽말약은 그녀를 민족해방 뿐만 아니라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의 전형을 이루었다고 그녀의 역사적 공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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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1일 18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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