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05월 04일

역사속 여성이야기

안정과 혁신의 시대 연 여황제

 
<2> 당대의 여황제, 측천무후

중국사에서 당제국의 측천무후(623∼705)처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여성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친아들 중종·예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황제가 된, 중국역사상 전무후무한 유일한 여황제이며 아울러 개원의치로 불리는 현종 전반기의 번영의 기초를 쌓은 여걸이었다.
 
측천무후의 이름은 무조(武照), 그녀 아버지는 고조 이연의 거병에 협력했던 지방의 목재상으로 후에 형주도독을 지낸 바 있었으나 그 당시 사회에서는 한문(寒門: 보잘 것 없는 집안)출신이었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와 총기로 이미 14세에 태종 이세민의 후궁이 되어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649년 태종이 51세로 병사하자 무후는 삭발하고 감업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태종의 뒤를 이어 셋째아들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고종은 감업사의 행차하여 바구니가 된 그녀의 모습을 엿보게 되었고 수심이 가득찬 이슬 머금은 20대 중반의 아리따운 무후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하여 중국풍속으로는 도저히 용납될수 없는 일이었지만 부왕의 총비였던 그녀를 환속시켜 후궁으로 맞아들이게 된다. 소의(昭儀)가 된 그녀는 차츰 본성을 들어내어 고종의 총애를 받아온 왕황후와 소숙비를 차례로 누명을 씌워 살해하고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황후의 자리에 오르니 그녀의 나이는 한창 무르익은 32세로, 새로운 이름 측천무후라는 경칭을 얻었다(655년).
 
고종은 병약하고 우유부단하였으므로 황후가 된 무후는 고종의 간질병을 이유로 정권을 손아귀에 쥐고(660년) 고종을 능가하는 실력자로 부상하여 고종과 함께 2인 天子로 불리었다.
 
그녀는 자신의 황후 옹립에 반대한 장손무기, 저수량 등 개국공신을 숙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황실의 이씨 일족에게도 무서운 탄압을 가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까지도 박해를 가했다. 고종이 아무 실권 없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처음부터 황태자로 봉해져있던 이충은 그녀가 낳지 않았기 때문에 폐위시켜 죽여버렸음은 물론이고 자신이 낳은 큰 아들 이홍도 황태자로 세웠지만 나이 들면서 어머니인 무후 자신의 일에 비판적이라고 하여 폐위시켰는데 그 후 이홍의 갑작스런 죽음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측천무후는 타고난 정치가였으므로 어머니이기 이전에 정치가였고, 권력의 맛을 본권력의 탐닉자였다. 이홍 다음으로 태자의 위에 오른 그녀의 둘째아들인 이현은 마침내 천자의 자리에 올라 중종이 되었고 무후는 태후가 되었다(683년).
 
그러나 중종의 왕후인 위씨(韋氏)도 시어머니를 닮아 보통 여인이 아니었는데 이 위씨가 무후의 뜻을 좇지 않았으므로 이를 제어하지 못한다고 중종까지도 미워하여 재위에 오른지 불과 3개월만에 중종을 폐위시키고 멀리 유배시켜 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이 낳은 셋째아들 이단을 천자로 삼으니 그가 곧 예종이며 현종 이융기의 부친이다. 이 무렵 무태후는 승려 회의(懷義)를 총애하여 불교를 숭앙하였으므로 불교가 크게 번성하였는데 무후는 구세주 미륵불이 하생한자로 당나라를 대신하여 천하의 주인이 될것이라는 설이 유포하고 이를 구실로 예종을 폐위시킨 후 드디어 스스로 황제가 되어(690년) 중국고대 주나라의 이상을 재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나라 이름을 주(周)라 하고 자신을 신성황제라 일컫고 아들 예종도 자신의 성 무(武)씨를 따르게 하였으니 이를 무주(武周)혁명이라 부른다.
 
이 때 무후의 나이 67세 였다. 이로써 이씨의 당제국은 일시 중단되고 무씨천하가 되었으며 장안 대신 낙양을 신도(神都)라 하여 수도로 정하고 정치·군사의 중심지로 삼고 구귀족을 숙청한 후 과거제도를 확대하여 신진관료를 대거 등용하고 국정을 쇄신하였다.
 
측천무후는 황제가 된 후 장역지 장창종등 미소년들과 어울려 젊음을 되살리며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고 천륜도 어쩌지 못하는 법, 계승자 책립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무후는 원로재상 적인걸의 의견에 따라, 원방으로 유배시킨 중종을 불러들여 자기의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그 후 적인걸의 추천으로 80세의 장간지를 재상에 임명하면서 무후의 최후는 드디어 결정이 났다. 705년, 장간지는 고령임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친위대 우영림의 장군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중종을 옹호하고 궁중으로 돌입하여 무후로 하여금 중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위케 하고 그녀를 상양궁에 감금하였는데 무후는 그해 겨울 유폐된 채 병사하니 그녀의 나이 82세였다.
 
종래 무후·위후(韋后)를 일컬어 여화(女禍)라 한 것은, 정치에 관여하고 황제 위에 오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남존여비의 유교주의 역사관에 입각한 부정적인 평가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무후시대는 생산력이 지속적으로 상승하였고 사회질서도 안정되었으며 강남지역에서 물자도 원활히 수송되어 국방도 충실하였으므로 내외가 안정되었고,관제개혁과 신진관료 등용으로 능력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혁신시대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무후통치 45년(660∼705)동안에 농민반란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객관적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할 것이다.
 
서안 서쪽 80㎞지점인 양산에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인 건릉 앞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서 있다. 하나는 고종의 비로 비문은 측천무후가 찬하고 중종이 해서로 썼다. 그런데 무후의 비인 다른 하나의 비에는 어찌된 이유인지 아무런 글씨가 씌어 있
 
지 않은 무자비(無字碑)다. 그 이유에 대해서 혹자는 무후가 너무 높고 큰 자신의 공덕을 표현할 글을 찾지 못한 까닭이라고도 하지만 그녀가 죽은 다음 찬탈의 경력을 넣지 않고는 기록할 수 없는 그녀의 비문을 섣불리 지을 수 있는 신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비석은 현재 섬서성 박물관 비림에 옮겨져 있다. 중국의 당왕조 연표에는 측천무후가 빠져있다.
 
[2011년 2월 18일 16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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