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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성이야기

사랑을 지키기 위해 낙화암에서 투신한 제2의 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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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 하면 충남 부여를 떠올리지만 낙화암은 강원도 영월에도 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아찔한 낭떠러지에서 투신한 영월 관기 고경춘이 마지막으로 올라가 생을 마감한 곳이 낙화암이다.


영월 관기 고경춘은 전통시대 신분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랑 스토리의 주인공 성춘향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로 강원도에서는 제2의 춘향으로 통한다.


고경춘은 영월의 관기(官妓)이다. 전통사회의 기녀는 원칙적으로 관청에 소속된 관기를 뜻하는데 관기는 어느 관청에 소속되느냐에 따라 경기(京妓)와 외방기(外方妓)로 나뉜다. 외방기는 지방관아에 소속된 관기로 외방기 중에서도 자색이 뛰어나고 재주가 있으면 경기로 뽑히기도 했다.


외방기는 주로 그 지역에 부임하는 관리에게 수청을 드는 것은 물론 양반들의 모든 공적사적인 잔치에 참석하고 노래, 악기 연주, 춤, 즉흥시, 창작, 재담으로써 흥을 돋우는 역할은 물론 변방 군사를 위로하기 위한 연행에도 참석했다. 주로 의복을 관리하는 바느질, 의녀로서 관리들의 건강까지 보살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고, 대신 관기들은 국가의 봉급을 받으며 일했다.


실제 기생이라하면 관리나 양반의 술자리 수청을 들면서 웃음을 파는 여성들로 오인하기도 하지만 엄연히 국가의 녹을 먹는 직장인이었고 관기는 함부로 몸을 팔수도 없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관원은 관기를 간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기녀관련 내용을 보면 기녀를 첩으로 들여 본처를 박한 사안이나 기녀와 사대부간의 간통사건, 기첩을 둘러싼 살인 및 상해사건이 종종 벌어짐을 볼 수 있는데 ‘관원은 관기를 간할 수 없다’는 규정을 지키지 않은 관원으로 인하여 관기들이 희생양이 된 셈이다.


어쨌든 엄격한 관리들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특출한 관기에 반해 잠자리 수청을 강요하거나 부당한 요구를 하는 관리들도 있었는데 영월 관기 고경춘도 그러한 관리에 의해 아까운 목숨을 던진 비운의 주인공이다.


오직 한사람을 위한 사랑, 불꽃같은 생애
20여년뒤 강원도순찰사 손암이 비석 세워


영월 관기 고경춘의 원래 이름은 고노옥이다. 1757년 영조 33년 영월읍 관풍헌 인근에서 태어난 노옥은 8세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살길이 막막해져 영월읍 관기가 되었다. 영월은 규모가 작은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관기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곳으로 단종의 무덤인 장릉이 자리잡고 있어 당대명사들의 방문이 잦았기 때문이다.


노옥이 관기가 되면서 새롭게 갖게된 이름이 경춘이다. 경춘은 뛰어난 미모와 가무로 영월관가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던 경춘에게 첫 사랑이 찾아왔는데 그 상대는1771년 1월~1772년 7월까지 영월부사로 재임한 이만회의 아들 이수학이었다. 15세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수학은 경춘과비슷한 연배로 둘은 만남 이후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수학의 아버지가 1년 6개월여 만에 영전하여 한양으로 떠나면서 둘은 이별을 맞게된다. 이수학은 “과거에 급제한 뒤 백년가약을 맺겠다”며 눈물의 길을 떠났고, 경춘은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후임으로 온 영월부사 신광수(申光秀)가 경춘에게 수청을 들것을 요구했다. 경춘은 이수학과의 언약을 밝히며 수청을 거절하자, 신광수 부사는 가혹한 매질로 하루가 멀다하고 괴롭혔다. 이를 참다못한 고경춘은 어느날 비장한 각오로 부사를 알현했다.


그리고 마치 각오라도 한듯 몸단장을 하고 들어가 웃는 낯으로 “몸을 조섭할 것이니 수 일후에 불러주시면 한번 욕정을 들어주겠다”고 말하고 이튿날 아침 부친의 산소를 찾아 하직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돌아와 어린 동생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빗겨준 다음 금강 벼랑에 낮아 몇 가락의 노래를 불렀다. 눈물은 이내 옷자락을 적셨고, 그 비통함은 참기 어려웠다고 경춘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경춘은 어린 동생이 따라와 있어 속여서 집으로 돌려보내놓고 낙화암 벼랑에서 분연히 몸을 물속으로 던졌다. 그때가 임진년1772년 10월이었고 경춘의 나이 겨우 16세였다. 당시 집안 사람들이 달려와 보니 옷속에 감춰져 있는 게 있었는데 옷을 헤치고 보니 이수학의 필적이었다.


사본 -9-1 고경춘의 비석.jpg고경춘의 숭고하고 지순한 사랑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사후 24년이 지나서였다. 도순찰사 손암 이공이 관동지방을 살피던 길에 영월을 지나가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미천한 신분인데도 이는 진실된 열녀라 할것이니 옳은 풍속을 세우는데도 도리가 아니겠는가”하며 자신의 봉급을 내어 영월부사에게 경춘의 절개를 높이기려 비석을 세워주도록 이르니 그것이 바로 ‘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春殉節地處)’다.


이 비석의 표제에 월기가 바로 영월 관기 고경춘을 지칭하는 말이다. 지금도 낙화암이 자리한 오솔길 낭떠러지에 고겨운을 기리는 키낮은 표지석이 오랜 세월 묵묵히 지키고 있는데 죽음도 불사하고 절개를 지켰던 경춘의 숭고한 사랑이 또렷이 남아있다.


영월지역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경춘의 사랑이야기가 세세토록 잊혀지지 않고 전해지게 된 건 당시 강원도 순찰사 손암 이병정의 배려와 뜻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터.


동강이 굽이돌아 흐르는 절벽위 한적한 오솔길에 자리하고 있어 일부러 찾지 않으면 그냥지나치기 십상이다. 어린 나이 오로지 살기위해 관기로 취직했지만 순수한 사랑을 지킨 경춘의 삶은 사랑보다 물질을 앞세우고 사랑마저 계산적인 요즘 사람들의 사랑관에 잠시라도 파문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유순희 기자

[2018126일 제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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