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을 찾아서-기장죽성 어사암
갯바위에 새겨진 이름을 더듬는 여인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옥가락지를 낀 손가락이 하얗고 섬세하다. 바위에 새겨진 이름은 ‘李道宰(이도재).’ 각자가 선명하다. 이도재의 숨결이 느껴지고 온기가 감지된다.
그 아래 새겨진 글자도 더듬어 본다. ‘妓月梅(기 월매).’ 기생시절 자신의 이름이다. 이 바위 이 이름들을 볼 때마다 월매 얼굴은 후끈 달아오른다. 20년 전 첫날 밤 합방이 어제 일인 듯 떠오른다. 속곳마저 벗겨낸 월매 보드라운 엉덩이에 손가락으로 자기 이름을 한 자 한 자 간질이듯 새겨 넣던 이도재 숨결은 아직도 뜨겁고 감미롭다.
바위 이름은 어사암. 애초 매바위로 불리었으나 어사 이도재가 다녀가고 나서부터 마을사람 스스로 어사암이라 개명하고 그렇게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어사는 특정사안을 조사하고 처리하려고 임금이 직접 임명하고 파견한 관료. 어사암을 바라보는 마을사람 눈빛엔 고마움이랄지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물이 빠지면 일부러라도 건너가 어사가 주안상을 받던 자리에 앉아도 보고 바위에 새겨진 이름에 합장하고 고개를 숙인다.
마을사람도 그렇거늘 두 이름의 한 당사자인 월매는 오죽 하겠는가. 물이 빠지는시간은 하루에 두 번. 이제는 가정이 있는 여염집 부인이라 자주 올 순 없지만 벚꽃휘날리는 오늘 같은 날엔 연례행사를 치르는 마음으로 찾아온다. 물 빠질 때를 기다려 갯바위에 올라서선 꽃다운 나이 열아홉그 며칠간 순정을 더듬고 또 더듬는 것이다.
어사암이 있는 곳은 기장 죽성 해안가.월전마을에서 두호마을로 넘어가는 해안가 널찍하고 평평한 갯바위군이 어사암이다. 널찍하고 평평해 물질에 지친 갯가 사람들 잠시 쉬기에 좋다. 바위에 등을 붙이고 대자로 누워 있으면 태양열로 달구어진 바위가 등을 지져 마치 안마를 받는 기분이다. 이름을 새긴 바위는 병풍처럼 선 바위. 두 사람 내밀한 사랑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바위 바다 쪽 면에 새겨서 이름을 보려면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어사 이도재가 이곳을 다녀간 때는 조선시대 고종 20년인 1884년. 한 해 전 늦가을나라에 바치는 공물인 대동미를 일광 독이포(지금의 문동리)에서 싣고 부창(부산진 공물창고)으로 가던 대동선이 풍랑을 만나죽성 앞바다에서 침몰하였는데 그것의 조사와 사후처리를 위해 어사가 파견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공무를 보는데 매바위 이름이 어사암으로 바뀐 연유는 무엇인가.
어사와 기생의 이름을 바위에 새긴 연유는 또 무엇인가. 당시는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들 배고픔이 이만저만이 아니던 때.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었고 그나마도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이었다. 죽성 어민들도 마찬가지. 그러던 차에 바로 코앞 바다에서 대동미를 긷고 가던 배가 침몰하자 어민들은 거룻배가있는 사람은 거룻배를 저어가서, 거룻배마저 없는 사람은 헤엄을 쳐가서 바다 밑바닥을 뒤지고 뒤져 볏섬을 건져내어 가족들 배고픔을 달랬던 것이다.
그런데 기장 관아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고 절도라는 죄목으로 관련자들을옥에 가두었다. 집집을 수색해 증거물인 볏섬들을 압수하고 관련자들을 심하게 매질해 죽는 사람까지 생겼다.
이러한 사실이 경상감영에까지 알려지고 감사가 장계를 올려 한양에 보고하자 이듬해인 1894년 이도재가 어사로 임명돼 기장에 파견되었던것이다.
갓 신방을 차린 서생댁도 부쩍 야윈 얼굴이다. 남편 역시 같은 죄목으로 이웃집 남정네들과 기장 관아에 투옥된 처지다. 작년 여름 인근 서생에서 시집와 신접살림을차릴 때만 해도 박꽃 같던 얼굴이 1년도 안돼 몰라보게 야위어 있다. 배곯는 고통에 남편 갇힌 설움이 겹쳐 눈물로 지새는 밤들이다.
한양에서 어사가 파견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한달음에 옆집에 사는 월매집을 찾아간 까닭도 남편 구명운동에 다름아니다. 당시 월매 신분은 관기. 관아에서 녹을 받는 대신 관아에 몸이 매인 기생 신분이었다.
열아홉 동갑내기라 월매와는 말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 월매 집엔 이미 여럿이 와있었다. 모두들 자기와 처지가 같은 마을사람들이었다. 사흘 굶어 군자 없다고 하지않던가. 더욱 억울한 건 건져낸 볏섬을 매질과 가혹행위로 부풀려서 집집마다 물리는 처사였다. 월매 너는 관기이니 어사 수청을 들 것 아니냐. 그때 우리들 억하심정을 고해 달라는 당부를 하고 또 하고 난 연후에야 발걸음을 돌렸다.
드디어 현장검증을 하는 날. 볏섬을 실어날랐던 해안가로 어사가 아전 몇을 대동한채 모습을 보이자 미리 나와 있던 서생댁을 비롯한 어민들은 허리를 조아리면서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 기장현감 유인형은 장계에서 살펴봤듯 비위 혐의가 있는데다 객관적 조사에 방해될까 싶어 현장검증에선 제외시킨 터이다. 올해 36세 어사는 백학이랄까, 새하얀 도포를 차려입은 추임새가그렇게 단정하고 늠름할 수 없었다. 어깨에 내려앉은 벚꽃 꽃잎이 좋은 조짐으로만 여겨졌다. 백성들 편에 서서 백성들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줄 것만 같은 후덕한 표정이 안도의 한숨을 절로 자아내게 했다.
물에 빠져야 제 모습 드러내는 사나흘간 사랑의 흔적
공의로운 월매 간청, 어사의 현명한 공무처리에 “감복”
현장검증은 무난하게 끝난다. 사실이 명백한 데다 주민들 또한 순순히 시인했기때문이다. 검증을 마치고 돌아서려는 찰나 월매가 앞을 막으며 큰절을 올린다. 양손을이마에 모으고 절을 올리는 자태가 백학에 버금갈 정도로 단정하고 우아하다.
어사와 기생이 마치 한 쌍의 학이다. 고개를 들어 어사를 바라보는 눈빛이 깊고 간절하다. 사연이 담긴 눈빛이다. “누구냐?” “관기 월매이옵니다.” “관기가 여긴 어인 일이야?” “긴히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하여 보아라.” “조용한 곳으로 가시지요.” 어사와 월매가 당도한 곳은 매바위 평평한 자리. 목이 마르던 차에 아담한 술상이차려져 있다.
서생댁을 위시해 주민들이 십시일반 갹출해 차린 술상이다. 술 한 잔 따라드리며 서생댁 억하심정을 들려주고 안주 한 점 집어드리며 관아 횡포를 들려준다. 관기로서 관아 눈 밖에 나면 후한이나 처벌이 어떠할지 모르지 않을 텐데 가상하다. 미인계를 쓸 만큼 용모가 빼어나지만자기 일도 아닌 일에 나서는 그 마음은 더욱 빼어나다.
‘天空更無物(천공경무물) 海鬪難爲詩(해투난위시) 環球九萬里(환구구구만리) 一爲可航之(일위가항지)’ 하늘은 텅 비어보이는 것이 없는데 사나운 파도는 시인을 위해 춤춘다. 구만리 밖 멀리 떠 있는 조각 배는 언제 돌아오려나. 경치에 취해 사람에 취해 시가 절로 나온다. 월매 역시 백학 같은 어사 자태에 취하고 후덕한 표정에 취해 어사 오언절구 가락에 맞춰 추임새를넣는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제 마음에 겨워선 몸을 일으켜 우아한 춤사위를 선보인다.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겨드랑이 살결이 백학마냥 하얗다. “바다에 수장된 곡식을 건져 먹은 게 무슨 큰 죄가 되겠는가.” 공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떠나기까지 나흘간 낮과 사흘간 밤은 어사에게도 월매에게도 일생 잊지 못할 낮과 밤. 현장검증과 어민들 증언을 바탕으로 절도죄로 투옥된 자들을 방면한다. 이 일로 어떠한 처벌도 어민들에게 하지 말 것을 기장현에 하달하고 현감에겐 경고조치를 내린다.
월매와 지내는 사흘 밤은 월매에게도 어사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밤이었다. 그건 신분을 뛰어넘는 지고한 사랑이었다. 나이를 뛰어넘는 지순한 사랑이었다. 나아가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 한 데서 시작한 나눔의 사랑이었고 이웃에 덕을 베풀려는 데서 시작한 베풂의 사랑이었다.
월매는 관기이고 어사는 공무를 보러 온 관료이기에 관기가 관료에게 수청 드는 것은 전혀 문제 삼을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어민들 입장에선 하나라도 더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이고 하루라도 더 모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마음 그런 심정이 매바위를 어사암으로 부르게 했다. 어사와 기생 이름을 바위에 새기게 했다. 원래는 어사가 지은 오언절구도 바위에 새겼으나 세월이 흘러 마모됐고 두 사람 이름만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도재 선행을 치하하는 불망비도 세웠다. 기장군 동부리 공덕비군에 그 비석이 옮겨져 있다. 월매는 뒤에 여염집 부인이 됐으며 이도재는 후덕한 인품으로 한말 학부대신, 외무대신,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1848년에 태어나 1909년 타계했다. 호는 운정또는 심제라 하였고 시호는 문정공이다./동길산 시인
[2013년 7월19일 제43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