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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성이야기

임란의 아픔 가슴에 묻고떠난 비운의 처녀

다대포처녀 윤백련(尹百連)
 
스토리텔링으로 만나는‘순란사민비’의 주인공
임진왜란 정신대 최초의 다대포 피해여성
 
 
 
잊혀진 우리의 이웃, 여성 <사하구편>
 
본지는 이번호부터 새 기획연재물로 역사속 잊혀져 가는 우리네 이웃가운데 고장마다 숨겨진 여인들의 이야기를 발굴, 소개한다. 때로는 걸출한 여성지도자로, 평범한 아낙으로, 의녀로, 또 때로는 질곡의 삶을 살다간... 이렇듯 다양한 삶, 다양한 모습으로 살다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의 삶과 오늘을 조명해 본다. 또한 이들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이루어야할 새로운 아젠다를 찾아보고, 다양한 방법으로 여성들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편집자 주>
 
 
 
 

조선 헌종 7년(서기1841년) 4월. 영의정 조인영 대감의 지시로 동래부사 홍종응이 임진왜란 당시 다대성 싸움에서 전사한 다대첨사 윤흥신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다대포 윤공단에는 첨사순절비와 그 왼쪽에 순란사민비(殉亂士民碑)가 같이 서 있다.
 
이 순란사민비는 다대성이 왜군에 의해 함락될 때 성과 운명을 같이 한 다대포처녀 윤백련(尹百連)을 아는 부산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아니 부산은 커녕 사하지역내에서도 그 이름이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지금으로부터 170여년전. 그녀를 찾아 떠난다.
 
다대주민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비석에는 비명만 있을 뿐 비문이 없어 누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떻게 희생을 당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참으로 기구한 사연으로 다대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곳에서이 비석의 주인 두 사람의 이름이 밝혀져 기록으로 오늘에 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 이름의 주인공은 윤백련의 아버지 윤곤절(尹昆節)과 어머니 모론(毛論)이다.(이충무공전서에서) 이 이름이 전해지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조선 선조 25년(서기1592년) 4월 14일. 부산성과 다대성을 차례로 점령하여 경상도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한 왜군은 이후 도둑떼로 변하여 먼저 김해에서 2일간의 분탕질을 하고, 5월 6일에는 거제도로 건너가 5월 7일 옥포에서 분탕질이 한창일 즈음 이 사태를 척후장 김 완으로부터 연락받은 이순신 장군의 연합함대는 기습으로 옥포 해안에 들이닥쳐 선창에 정박해 있던 왜선을 향하여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왜군함대는 순식간에 아비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이틈에 우리 장수들은 26척의 왜선을 단숨에 격파하여 첫 승전을 거두게 된다.(옥포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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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끝나자 이순신 장군은 전장수습을 명령하는 한편 “격파된 왜선에는 필시 우리 사람들이 잡혀 있을 것이니 배를 수색하여 찾아오라”는 지시도 함께 하달한다. 이에 각 장수들은 그들이 격파한 왜선을 수색하던 중이 해전에서 우부장으로 참가했던 보성군수 김득광이 그가 격파한 왜선의 선창에서 일본 옷을 걸치고 머리를 단발하여 마치 일본여자 같이 보이는 처녀 아이를 찾아내어 조사를 마친 후 이순신 장군에게 조사 보고서를 올린다.
 
이름은, 윤백련입니다. 나이는, 14살입니다. 주소는, 동래부 사천면 다대리입니다.고향은, 동래부 동래읍 오장리입니다. 부모는, 아버지는 다대진 수군 윤곤절(尹昆節)이고, 어머니는 상민인 모론(毛論)입니다. 현재 부모 행방은, 아버지는 난리통에 행방불명이 되었고 어머니는 다대성에서 죽었습니다.
잡혀온 경위는, 다대진에서 난리가 있기 전날 참사로부터 피난 명령이 내려와 우리 윤씨 일가는 윤씨내(다대고유 지명)를 따라 앞산 안골샘 숲속에 숨어 있다가 이튿날 난리가 끝나고 밤이 되어 조용해지자 오빠 복룡이와 함께 성안 집으로 돌아 왔으나 군인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성에 남았던 엄마는 불탄 집 안에 죽어 있었고 출전한 아버지는 찾을 길이 없어 오빠와 함께 어머니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한 후 동래에 있는 할아버지 집을 향해 길을 나섰다가 부산포 근처에서 왜군을 만나 오빠는 도망을 쳤고 나는 그들에게 잡혀 배에 끌려와 갇히는 몸이 되었습니다.
 
이후 왜군에게 매일 같이 수도 없이 몹쓸 짓을 당하고, 성 노리개가 되어 있던 중 잡히어 온지 보름쯤 되는 어제(5월 7일) 갑자기 천지를 진동하는 뇌성소리와 함께 배위에 포탄과 불벼락이 비오듯 하자 왜놈들은 철편에 맞아 피를 질질흘리며 죽어갔고 일부는 바다에 뛰어들어 산 쪽으로 헤엄쳐 도망갔습니다. 나는 겁이 나서 배 밑 바닥에 숨어 있다가 이렇게 구출되었습니다.
 
보고서를 읽고 난 이순신 장군은 먼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한다. “흉악한 놈들, 해독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러 백성들을 살육하고 재산약탈 행위가 극심하니 잎으로 우리 사람이 몇이나 남을고...”
그리고 지시를 내린다.
“이 아이를 순천이나 보성으로 보내어 관리들에게 특별히 보살피게 했다가 온전히 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라”

그러나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끝내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다대포 처녀 윤백련은 임진왜란 정신대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그곳 보성 땅에서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한다.
 
한 건 다대문화연구회장
사하이야기 게재
 

〔2012년 9월 25일 제35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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