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에 도전한 여전사 강청(江靑: 1914~1991)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대륙에서 문화대혁명(문혁)이 진행되는 동안 강청(江靑)은 그의 남편인 모택동의 후광을 업고 권력의 행사자로, 정책의 조정자로 활동하면서 여성정치지도자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했으며, 강청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리고 있다.
그녀의 정적들은 그녀를 부도덕하고 탐욕스러우며 복수심에 눈이 먼 여자라고 매도한다. 반면 혁명노동자들은 강청을 여성혁명투사로 존경한다.
그럼 그녀의 삶을 추적해 보자강청은 1914년 산동 제성(諸城)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 이름은 이진해(李進孩)였으며, 후에 이운학(李雲鶴)으로 바꾸었다. 부친 이덕문(李德文)은 산동성 지주로서 현성에서 나무공방을 경영했고 어머니 이란씨(李欒氏)는 이덕문의 둘째부인으로 첩이었다.
이진해의 어릴적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의 동네에 단운전(單雲田)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함께 싸우며 놀다가 이진해를 보고,"넌 첩의 자식이야! 누가 모를 줄 아냐, 너희 집에는 전부 나쁜 사람들뿐이야!"라고 놀렸다
원한을 품은 이진해는 경찰이던 이복오빠 이건훈을 시켜 단운전의 집안을 풍비박산 내버려 동네 애들은 모두 무서워 진해를 피해 다닐 정도로 맹랑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녀의 어린 시절은 남편으로부터 매 맞고 쫓겨난 엄마와 함께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다.
1921년 여름 소학교에 입학할 때, 교장선생이 강청의 키가크고 두 다리가 가늘고 긴 것을 보고는 이운학(李雲鶴)이라는 학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그 후 강청은 제남, 청도, 상해에서 '장숙정(張淑貞)'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상해탄에서 영화회사에 들어갈 때는, '남빈(藍蘋)‘으로 개명했다.
연극을 좋아해서 순회극단에 들어간 후 산동성립실험극원(山東省立實驗劇院)에서 노래와 연기를 배웠다. 1934년에 상해로 가서 좌익연극운동에 참가하며 여배우 남빈으로서 영화나 연극에 출연했는데 <인형의 집>의 노라를 연기하여 호평을 받아 21세의 나이로 다소 유명세를 탔다.
특히 청도와 상해에서 활동할 때 동거나 결혼을 몇 차례 했으며 특히 남편이었던 영화평론가 당납(唐納), 연출가 장민(章泯)과의 삼각관계는 스캔들이 되었다. 당납의 명성을 이용해 영화계 스타가 되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납과 이혼 후 장민과 동거했는데 미인계를 쓴다는 비판이 일자 실의에 빠져 노구교사건 이후에 그녀는 1937년 8월 공산당 해방구였던 연안으로 가게된다. 그녀는 다시 이름을 강청이라 개명하고 이후 모택동과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름의 유래는 당시(唐詩) <상령고슬(湘靈鼓瑟)>에 나오는 "곡종인불견(曲終人不見), 강상수봉청(江上數峰靑)"에서 '강청(江靑)'이라는 이름을 따서 지었다. 강청의 연기에 반한 마오쩌둥은 그 당시 병을 치료하고 있던 둘째 부인 하자진(賀子珍)과 인연을 끓고 1938년에 강청과 결혼하기로 결심하자 중공중앙 정치국의 최고 간부들은 강청이 정치경력이 없고 배우로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던 것을 경멸했다.
그래서 당은 이 결혼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강청에게 20년 동안 당의 직책을 맡지 말아야 하고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되며 오직 가정주부로 서 모택동을 보좌할 것을 요구했다 .
그 해 11월 ,24세의 강청은 21세 연상의 모택동과 결혼하였으며 1940년에 딸 이눌 (李訥)을 낳았다. 인민공화국 성립 후 강청은 중공중앙선 전부 문예처 부처장이 되어 처음 당내 공식적인 직함을 갖게 되었다.
1950년대에는 영화 <청궁비사(淸宮秘史)>, <무훈전(武訓伝)> 등이 반동적이고 매국적이라 비평하고, 유평백(兪平伯)의 [홍루몽]연구에 대한비판운동에도 앞장섰다.1960년대에는 혁명을 주제로 한 현대 경극의 창작을 장려하여 혁명모범극 <양판희(樣板戱)>의 탄생을 지원하면서 경극혁명의 기수로 행세하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강청은 중앙문혁소조 부조장(副組長)으로서 정치의 표면에 등장하게 된다.
홍위병에게 마오쩌둥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연출하여 ‘기수(旗手)’라고 불렸고 1969년에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 되어 명실 공히 손안에 권력을 쥐었다.
문혁을 이끈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 등 “4인방”은 원로간부들 중 가장 먼저 주은래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격하기 시작한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이나 당의 여황제 무측천을 재평가하려는 캠페인 등 모두를 직접 조종하면서 중국사회를 소용돌이 치게했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한 지 1개월후, 하늘을 찌를듯한 권력자로 자처하던 강청· 요문원(姚文元) 등 ‘4인방’은 체포당해 반혁명집단으로서 재판을 받게 된다. 1981년에는 사형판결(집행유예2년)을 받았으나, 1983년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었다. 1991년 3월 15일, 강청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꾼다.
이때 강청은 이미 보석으로 외부병원에 있었다. 그녀는 입원환자 이름에서 이윤청(李潤靑)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것은 그녀가 모택동과의 혼인을 그리워하는 것을 다시 한번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윤(潤)'은 모택동의 초기에 사용했던 자 윤지(潤之)에서 따온 것이고, '이'는 강청의 원래 성이며, '청'은 강청의 청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페어뱅크연구센터 교수인 R. Trier는「 강청전서」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1991년 5월 14일 새벽 3시 30분, 간호사 한 명은 강청이 이미 화장실 욕조 위에 목을 매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일찍이 연기자, 정치가, 문예여왕 및 모택동의 부인이라는 신분을 한 몸에 가지고 있던 강청은 77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강청은 난관을 극복할 줄 아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으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을 내던지는 야심 찬 여성이었다.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서, 또 정권의 정상을 향해서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모택동의 최측근으로 정권을 다시 장악하기 위한 문혁의 발동에 기여하면서 강청은 정치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그녀의 정적들에게 모욕을 주고 타도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강청에게 권력을 물려주지 않았다.
모택동은 강청이 그의 사상을 계승하였고 그의 과업을 함께 하였으나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고 통치의 법칙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택동은 강청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불을 붙이는 재주는 있지만 큰 불을 취급하거나 꺼버릴 줄은 모른다고 보았던 것이다.
문화대혁명기에 강청은 운동을 빌미로 사사로운 원한을 사악하게 풀기도 하여 민중의 원한을 샀지만, 그녀를 비판하는 의견가운데는 옛날부터 이어져온 중국의 여성혐오도 느껴진다. 또한 ‘4인방’이 악의 화신으로서, 마오쩌둥이나 당 조직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비판까지도 대신 짊어져야 했던측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2011년 12월 19일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