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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성이야기

철통같은 운명을 개척한 여성 운동가

 
대지의 딸-강극청(康克淸 : 1911~1992)
 

 
1983년 9월 북경에서는 제5회 중국여성대표대회가 열렸다. 중화전국여성연합회 주석으로서 중국여성운동의 최고책임자로 있는 강극청이 등단하여 연설을 했다.
 
뼈대 굵은 체구,의지가 강한듯한 입매무새, 다정해 보이는 밝은 표정, 얼핏 보아도 서민적인 그녀는 당시 중국공산 당 중앙위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 등을 겸임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남존여비사조가 또 다시 만연하여 결혼의 자유를 침해하고 거액의 지참금이 오고가는 것은 물론,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죽이고 그 어머니에 대해서는 갖은 학대를 가하 고 있습니다…”
 
단상에서 힘주어 강조하는 강극청의 눈에는 ‘동양식’(童養媳 ; 어린 여아를 싼값으로 사서 아들의 배우자로 미리 정해 놓는 것으로 일종의 민며느리를 말함) 으로 자라났던 가난한 농촌여성인 자신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강극청은 강서성 만안현의 가난한 어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생후 40일만에 근처의 빈농에 ‘동양식’으로 맡겨졌다. 그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 집 아들과 결혼하진 않았지만 그 집 양녀가 되어 ‘계수’라고 불리었다.
 
양부모는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이었다. 5, 6세가 되면 서 강극청은 아침 일찍일어나 물소를 산으로 데리고 가서 풀을 먹이면서 나무도 하고 산나물도 캐는가 하면, 돌아오는 길에는 산더미 같은 나무를 등에 짊어지고 소를 몰고 오는 노동을 매일 되풀이했다.
 
13세가 되면서부터는 부엌일, 밀가루 빻기, 농사일, 짚신 만들기 등 언제나 억척같이 한사람 몫 이상의 일을 해냈다. 옛 중국 여성들의 비극의 전형인 ‘동양 식’으로 맡겨져, 태어나면서부터 가난과 고통 속에서 자랐지만 강극청은 동정심이 많았으며, 양보하는 정신과 밝은 성격의 소유자여서 운명의 여신조차 그녀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이처럼 노동과 빈곤으로 세월을 보내던 강극청에게 일대 전환의 계기가 된 사건은 국공합작 하의 국민혁명이었다. 황포군관 학교에서 여성병사를 모집한다는 소문은 강극청의 마음을 흔 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 무렵 농촌에 농민협회가 성립되고 여성운동원이 여성회를 조직하려 하자 그녀는 그 준비를 맡아 분주히 뛰어다니며 일을 도우고 또 그들을 본받아 머리도 짧게 잘라 버렸다.
 
이에 놀란 양어머니는 정색을 하고 그녀를 어서 혼인시키려했다. 그녀는“나는 절대 시집가지 않아요!”라고 얘기하였고, 곧 공산주의청년단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어떻게든지 여군이 되고 싶었다.
 
결국 그녀는 고향을 등지고 홍군을 따라 정강산으로 들어갔다. 정강산의 겨울은 혹독하여 온몸은 동상으로 시달렸고 게다가 적의 포위망은 더욱 그 들을 괴롭혔다.
 
1929년 1월 모택동·주덕등은 군사 일부를 인솔하고 산을 내려가 싸우게 했는데 강극청도 그들을 따라서 선전활동에 참가하며 싸웠다. 그러나 그해 2월 주덕의 군대가 적에게 포위되어, 우수한 조직자이며 ‘쌍권총의 여장군으로 이름 높던 주덕의 아내 오약란이 부상당한 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처형당하고 말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명성높은 주덕(朱德: 1886~1976)은 독일에 유학한 바 있으며 8.1 남창봉기를 지도한 홍군 창시자로 중국 최고의 군사 지도자였다. 1983년 9월 북경에서는 제5회 중국여성대표대회가 열렸다.
 
중화전국여성연합회주석으로서 중국여성운동의 최고책임자로 있는 강극청이 등단하여 연설을 했다. 그 후 강극청은 함께 싸우고 함께 행진하면서 차차 주덕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되었고 마침 내 그들은 결혼했다.
 
그때 주덕은 43세 그녀는 17세로 26년이나 차이가 났다. 결혼 후에도 그들은 서로 같은 부서에서 활동했는데, 주덕은 일상생활 속에서 아내에게 명령한다든지, 주위의 신세를 지게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극청은 주체적으로 선전활동에 참가하면서 글을 배우고 이론적 학습에 몰두함으로써 점차 활동가로 성장해 갔다. 1930년에는 길안(吉安)에 있는 소년학교 교장이 되었고 1931년 11월 서금(瑞金)에서 열린 제1회 전국 소비에트 대표대회에도 참가하였으며 그해 바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강극청의 꿈은 뛰어난 홍군전사가 되는 것이었다. 1932년 그녀는 2천명으로 구성된 여자 의용대 대장이 되어 서금에서 훈련받고 또 홍군대학에 들어가 군사·정치 훈련을 받았다.
 
드디어 1934년 감 주일대의 유격대 시찰임무를 받고 파견된 그녀는 멋지게 적을 격파 하였으며 이때부터 “주 덕의 아내는 강하다”는 평판과 함께 유명해졌다. 1934년 국민당의 제5차 포위공격에 못이겨 홍군주력부대는 ‘북상항일’을 내걸고 장정을 떠났다.
 
강극청은 주덕과 함께 장국도의 분열책동에 말려들어 티베트에서 겨울을 넘기고 죽음의 대습지대를 세 번이나 넘은 끝에 1935년 10월 간신히 모택동과 합류했다. 강극청은 등영초와 함께 장정에 참여한 30여명의 강인한 여성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대장정의 고난도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오랜 산보’와 같은 것으로, 실제 그녀는 약한 사람들의 짐까지 짊어지고 끝까지 계속 걸어간 억척같은 여성이었다. 연안에서는 중앙당학교와 항일 군정대학에 다니며 군사지휘관의 길을 닦았다.
 
항일전이 시작되자 1937년 10월 주덕과 함께 전선에 도착하여 민중을 조직하고 항일근거지를 만드는 활동에 참가하여 1938년에는 산서 동남여성구국회 주임이 되었다.
 
그 후 1940년대 초 유명한 정풍운동이 시작되자 여성활동 방침에도 비판이 일어 항일민주 의 과제와 여성해방의 과제를 결합시키며 여성대중의 생활실태에 맞는 운동을 진행하도록 하여 생산, 보육위생 식자(識字; 글 가르치기) 등 세가지 중심과제가 해방구운동으로 진행 되었다.
 
이 시기 주덕도 여성운동에 열심히 참가했고 강극청도 몇안되는 노동여성 출신의 지도자로서 여성운동의 지도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1945년에는 해방구보육아동위원회의 대리주임이 되었고 1949년 내전에서의 전국적 승리를 눈앞에 두고 중화전국민주여성연합회가 성립되자 강극청은 집행위원 겸아동복지부 부장이 되었다.
 
여성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아이도 낳지 않겠다고 했던 강극청이었지만 혁명의 요청에 따라 노농(勞農)여성 대중의 대표로서 여성운동과 아동복지사업을 전 국민에게 확산 시키는 일을 맡았다.
 
최악의 가난 속에 동양식으로 팔려간 강극청은 각고의 노력으로 주덕 [朱德]의 아내이면서 중국 의 사회운동가로 성숙하여 전국인민대회 대표, 인민정치협상 회의 상무위원, 전국부녀연합회 부주석, 인민보위 아동전국위원회 비서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6년 남편이자 전우이고 훌륭한 지도자였던 주덕을 잃은 그녀는 생애에서 가장 중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지도자로 일하였다. 문혁(文革)의 회오리가 지난 뒤 그 분열의 상처는 그녀 에게도 대단히 깊은 것이어서 1978년 제4회 전국여성대표대회에서 강극청은 문혁 중 에 부정되었던 그 이전의 여성운동방침은 올바른 것이었다고 선언하였다.
 
중국 농촌에 뿌리를 두고, 또한 혁명의 와중에서 꿋꿋하게 살아온 대지의 딸 강극청의 생애 는 자신의 손으로 철통같은 운명을 개척해 나간 대표적인 한 예로서 그녀의 강인한 의지는 우리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준다.
 
[2011년 11월 18일 25호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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