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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성이야기

노신(魯迅)의 그늘을 벗어난 여권론자

 
노신의 부인 허광평(許廣平1898~1968)
 

근대 이후 중국문인 가운데 노신 (1881~1936)만큼 유명한 인물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부인으로 말년에 노신이 10년 동안 맹렬한 문필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준 숨은 보조자 허광평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다.
 
그래서 그녀의 일생을 살펴보고자 한다. 허광평은 1898년 광동성 번우현(番禺縣)에서 유복하고 개명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하루만에 어머니가 묶어준 전족을 풀 수 있었던, 보통과는 다른 가정환경이었다.
 
아버지와 오빠가 읽고 해설해주는 신문기사 내용을 통해 어린 나이에도 여성도 인간인 이상국가를 위해 무언가 책임의식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지지를 얻어 남자형제들과 함께 가숙(家塾)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오빠와는 달리 자신은 여자라고 적당히 가르치고 말 기세를 보자 남녀차별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자신에게 아버지가 미리 정해놓은 정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강하게 반발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다행히 오빠에 의해 그 결혼은 파혼이 되었다. 파혼한 허광평은 고모가 사는, 먼 북방의 대도시 천진으로 유학을 가서 여자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곧 이어 휘몰아친 1919년의 5.4운동이라는 거친 파도에 휩쓸리면서 허광평은 천진의 여성계를 조직하고 여사주간(女師周刊) 등 여성잡지 편집을 맡으며 애국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5.4애국운동은 여학생들에게 ‘남녀유별’이라는 사회통념을 깨고 구식 예교에서 벗어나는 환희를 주었다.
 
5.4운동의 열기가 수그러들어 퇴조기에 접어든 1922년 그녀는 천진여자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여교사 자리를 얻는 대신 향학열에 불타 여자사범학교의 상급 학교인 북경여자고등사범학교로 진학했다.
 
뒷날 북경여자사범대학으로 개명하게 된이 학교에 다니면서 학생회장이 된 그녀는 학생들에게 현모양처 교육을 강조한 여성교장을 배척하는 학생운동을 주도하면서,그 때 강사로 출강하던 노신과 가까워졌다.
 
식 예교질서에 대한 강한 반감이라는 유대감에서 출발한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연인관계로 발전하였다. 교장 배척운동에 성공한 허광평은 학교를 졸업한 1926년 28세의 나이로 고향 광주로 내려가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한편 노신은 홀어머니가 정해준, 전족에 문맹인 처와 형식상의 결혼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상태를 끝내고 2년 뒤 허광평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는 홀어머니와 처가 있는 북경을 떠나 하문(厦門)을 거쳐 광주로 내려왔다.허광평은 박봉과 과중한 잡무, 학교와의 갈등으로 교사생활에 환멸을 느껴 그만두게 되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노신의 조교로 일하였다. 
 
그러나 1927년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어 흉흉해진 광주를 벗어나 두 사람은 상해로 향했고 상해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전업주부의 길이 시작되었다.
 
18세 연상에 논적(論敵)이 많았던 유부남 노신과의 동거는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 그녀는 친정식구들과 관계가 뜸해졌고 남들에게는 첩이라는 손가락질도 받았다.
 
게다가 노신은 국민당 정부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받고 있었으므로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야 했으며 몰래 주소지도 옮겨야 하는 등 삶자체가 고단한 일상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새벽까지 글을 쓰는 외에는 일상생활에 무관심한 노신의 아내이자 비서로,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의 어머니로서 노신이 1936년 사망하기까지 10년이란 세월을 위대한 거목의 그림자처럼 묵묵히 도우고 일하면서 보냈다.
 
노신이 만년의 10년 동안 유달리 작업을 많이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마도 허광평이라는 유능한 비서 겸 아내를 두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었던 점이 상당히 작용하였을 것이다.
 
노신은 허광평을 일러 “10년 동안 손잡고 어려움을 함께한 사이(十年攜手共艱危)”라고 고마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허광평은 전업주부로 만족할만한 성정은 아니었다. 노신과 동거생활을 하면서도 직장생활을 원했다.
 
그러나 자신을 도와서 글을 더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노신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무위로 끝났다. 자신의 삶에서 그토록 용감했던 신여성인 허광평도 노신과 이룬 가정에서는 그의 가부장적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노신에 대한 애정이 한결같았던 만큼 결혼생활은 평탄한 편이었지만, 불만을 속으로 삭이고 자기 위안을 하면서 보낸 10년 세월이 그녀의 마음에 새겨둔 상흔은 노신 사후 터져 나온 그녀의 여권 관계 글들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노신이 죽은 뒤 허광평은 노신 생전의 작품들을 묶어서 전집을 출간하는 등 노신의지적 유산을 보존, 계승하는 작업을 하며 일약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동시에 그동안 뜸했던 집필활동을 시작했다. 허광평의 글들이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은 노신과의 서간문을 묶어서 출간한 [양지서(兩地書)]였다. 이 후 그녀는 그동안 독자적인 직업을 갖거나 사회활동을 하지 못한 데서 오는 좌절감을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여성운동의 투사로 거듭났다.
 
공산당이 상해 지하에서 펴내던 여성잡지 [상해부녀] 등을 편집하고 여러 여성단체 책임자로 일하면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글들을 썼다. 여성이 가정에서 일하는 것은 남편의 죄수나 마찬가지이므로 여성이 직업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여성해방의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신 사후 10여년간 여성 해방과 항일운동을 병행하면서 결국 구국이 1차적인 과제라고 깨닫고 전후 부흥의 단계에서는 여성의 노동력이 더욱 필요하므로 여성을 가정에서 해방시켜 사회의 일꾼으로 만들어야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리고 내전 기간 중공산당이 소집한 인민정치협상회의에 민주촉진회 대표로 참가하여 일약 중앙정부의 고위급 인사가 된다. 또한 중국부녀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고 건국 이후에는 민족촉진회 제1차 비서장에 선임되는 등 민주당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1950년대까지의 맹활약이 있은 뒤 문혁때 그녀는 노신의 원고를 홍위병들에게 압수당하는 뼈아픈 수모를 당했고, 결국 문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심장병으로 그녀는 갑자기 사망했다 향년 70세였다.
 
허광평이 노신 사후 그의 성망 덕분에 상해의 여성계와 지식인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녀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그녀는 노신 사업을 계승하면서, 아울러 생의 후반 30여 년간 그녀 자신의 독자적인 업적과 지위를 일궈나감으로써 노신의 그늘에서 벗어나 여권론자로서의 치열한 삶을 영위하였던 것이다.
 
[2011년 10월 7일 24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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