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05월 04일

역사속 여성이야기

흉노왕 선우에게 시집간 비운의 주인공

 
 
<1> 한대의 여성 왕소군

 3천 6백년의 긴 중국 역사 속에는 무수히 많은 여성들이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여후(呂后), 왕소군, 반소, 화목란(뮬란), 측천무후, 양귀비, 이청조, 서태후, 추근, 하양응, 송경령, 등영초, 송미령, 채창, 강극청, 강청 등 잠깐 들추어보아도 알만한 이름들로 가득하다.
 
그녀들이 중국역사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했든지 부정적인 역할을 했든지 간에 동양적인 남존여비의 풍습과 상황 속에서 아직도 인구에 회자함은 그만한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역사연재물은 흥미진진한 중국사 속의 여인들을 택하기로 했다. 이 역사시리즈가 몇 회까지 연재될 수 있을 지는 오직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 그리고 필자의 노력에 달려있으리라 본다.
 
맨 처음 찾아가 보려는 중국여성은 흉노에게 시집갔던 비운의 한대(漢代) 미인 왕소군(王昭君)이다.
 
비운의 여인 왕소군
왕소군은 이름이 장(牆)이고 소군은 자(字)로 전한(前漢) 원제(元帝)때 후궁으로 들어갔다. 당시 중국 북쪽 변경을 어지럽히던 남흉노가 북흉노와의 싸움에서 지자남흉노 왕 호한야선우(선우는 흉노왕을 뜻함)는 한왕실에 내조하여 “한 나라의 황녀를 아내로 얻어 천자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원하며 한 왕실과의 혼인을 조건으로 한에 복속하고자 하였다.
 
한나라는 고조 때부터 화번공주(和番公主)를 보내 흉노를 회유하여 왔으나 일시적 미봉책에 불가하였고 해마다 막대한 장병과 물자를 소비하여 흉노를 막아야 했다. 그 좋은 예가 만리장성이다. 그런데 한 여인을 보냄으로써 분쟁을 면할 수 있다면 이에 더한 다행이 없다고 생각하여 원제는 호한야선우의 제의를 수락하고 공주(실은 궁녀)를 보낼 뜻을 공약하였다.
 
흉노 땅은 장안과 만리나 떨어져 있는 먼 곳으로 한서가 극심한 황막한 사막지대이므로 한나라 사람은 적응하기 어려워 죽게되는 수가 많았다. 그 당시 한의 후궁에는 미녀가 많았는데 천자는 화공에게 그들의 화상을 그리게 하고 이에 의해 미인을 골라 총애하였던 관계로 궁녀들은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보내 자기를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소군만은 뇌물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초상은 보기 싫게 그려졌고 이 까닭으로 원제의 눈에 띄는 일이 없었다. 마침 호한야가 천자에게 사위되기를 청하였을 때도 천자는 초상화에 의하여 가장 못생긴 궁녀를 뽑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3천의 궁녀들은 놀라움에 온통 법석이었다. 모두가 비운을 모면하려고 다투어서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많은 뇌물을 보내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제각기 부탁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이번에도 한치의 비단도 뇌물로 바치지 않았다. 욕심많은 모연수는 필력을 남용하여 소군의 초상만은 일부러 추하게 그렸던것이다.
 
이제 막상 보낼 때가 되어 황제는 못생겼기 때문에 뽑혀 멀리 독지로 시집가게 된 불우한 여인을 가엾게 여겨 마지막으로 몸소 이별의 술잔을 내리기 위해 소군을 인견하였다. 눈물을 머금은 채 원제앞에 가까이 걸어오는 왕소군을 한번 본 황제는 너무 나도 뜻밖의 일에 크게 놀랐다.
 
그 용모며 기품이며 행동거지가 후궁 중 제일이 아닌가! 원제는 진작 이러한 미인을 총애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며 소군에게 애련의 정을 금치 못하였지만 이미 선우와 약속한 일이므로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라 눈물을 머금고 잔을 내리고 한숨으로 전송하였다.
 
원제는 모연수가 그린 화상은 붓의 장난임을 직감하고 즉시 그를 참형에 처했다. 이리하여 소군은 선우를 따라 머나먼 오랑캐 땅으로 떠나게 되었다. 사막의 아침해와 산기슭에 걸린 달을 보며 소군은 장안의 고향 생각 부모혈육 생각에 너무나 안타까워 사향(思鄕)의 곡을 지어 비파를 타면서 외롭고 슬픈 마음을 달랬다.
 
상상밖의 미인을 만난 호한야선우는 왕소군을 위해 새로 궁실을 짓고 주야를 가리지 않고 총애하였다. 그리하여 소군은 아들 달(達)을 낳았으며 그녀는 흉노백성을 사랑하고 그곳 여인들에게길삼과 재봉, 농업기술을 가르쳐주어경애를 받아 영호알지(알지는 흉노왕비의 뜻)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후 2년쯤 지나서 호한야선우는 급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호한야 사후흉노의 풍습에 따라 다음 왕의 후궁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호한야의 장자이며 달의 이복형인 복주루 선우와 재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유교적 전통사회인 한의 풍습을 보면 불륜인, 전 남편의 이복아들과의 재혼을 마다하여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한다.
 

그녀의 무덤은 흑수하변에 만들어져 청총이라 불리었는데 황막한 사막인데도 언제나 소군의 무덤에는 푸른 풀이 자라서 그렇게 불렀다고 전한다. 소군의 죽음이 한실에 알려지자 천자를 비롯하여 후궁의 여인들에 이르기까지 비통한 감동에 잠기었으며 그 후 왕소군의「 사향곡」은 한나라에 전해져 즉시 크게 유행하였다.
 
이 고사가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수 없으나 한서(漢書) 흉노전에 왕소군의 일이 실려있다. 그리고 왕소군에 관해서는 그 후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시로, 노래로 불리었으며 연극도 만들어졌는데 어느 것이나 왕소군은 한없이 원한을 품고서 쓸쓸하고 가슴 아픈 심정으로 화친을 위해 흉노에게 시집갔다고 하는 슬픈내용을 담고 있다. <계속>
 
 
 
[2011년 1월 17일 15호 13면]
 

추천0 비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