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애자와 마두금 이야기
내가 필요할때 늘 있어주는 존재
사랑은 줄 줄 알아야 받게되는것
사랑은 줄 줄 알아야 받게되는것
거리에 빨간 줄장미가 현란한 색으로 치장하고 하늘의 뭉게구름은 알래스카의 맑고 푸른 하늘을 생각게 하는 유월의 한 낮이다. 딱히 할 일이 없어 딸아이에게 볼만한 영화나 하나 추천해 달라고 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 눈물없이는 볼 수 없다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 ‘애자’를 보게 되었다.
‘애자’. 치고받고 욕지거리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아 대던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암에 걸려간병이 필요하게 될 때 애자는 엄마를 헌신적으로 돌봐주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애자처럼 족을 위해 내 전부를 쏟아부을 수 있을까?’ 새삼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종신보험이 한창 유행이던 몇 해 전. 너도나도 시류를 쫓아 종신을 외칠 때 ‘나 죽고나면 무슨 소용있나? 연금이나 들어야지’하고 외면하던 나 역시 남편과 내 명의로 각각 종신을 넣었다. 보통의 주부라면 남편에게 더 많은 보험금을 배팅하겠지만 나는 2배가 되는 금액을 선뜻 나 자신의 보험에 주 계약으로 설정을 했다.
남편이 죽을 때 보다 내가 죽으면 더 많은 보험금이 나오는데, 혹자가 보기에는 맘 착한 본처가 남편을 위해 돈을 많이 남기구나 하겠지만 나의 진정한 속내는 그게 아니었다. 내가 가입한 종신보험은 암 선고를 받으면 임종 6개월 전에 보험금을 미리 탈 수 있다는 조건이 붙어있었으니 말이다. 죽기 6개월 전에 보험금을 타면 믿을만한 간병인 한명은 꼭 고용해야지! 가족들에게 크게 짐이 안 되고도 죽음까지 나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이라는 황금만능주의적 사고를 나도 모르게 가지게 된 때문인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부모도 고려장하는 현 세태를 반영하여 숱한 드라마를 많이 본 나를 탓하면서도 돈이면 그 지극히 서러운 경우를 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만일 내가 누운 자리에서 똥칠이나 하고 항암치료니 뭐니 해서 돌아눕기도 힘들어지면 남편이나 자식들이 정말 나를 위해 얼마나 헌신해줄지 믿음이 가지 않아 안전장치로 내가 쓸 돈을 마련하자는 꿍심의 발로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애자’라는 비디오를 보면서 내 생각에 수정을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생각의 전환은 나 스스로에게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하는데, 사랑을 주는 것과 받는 것, 무엇이 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내가 필요할 때 늘 있어주는 사람을 갖는 것과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이 나의 삶을 더 의미있게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주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애자’는 친구와 애인에게 뜨거운 배신을 경험한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믿음이 무너질 때 그들을 향한 분노와,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럼으로 더 많이 괴로웠을 ‘애자’는 세상의 사랑에 좌절한다. 그러나 그 순간 내가 사랑을 부을 수 있고 내 사랑을 기다리는 존재 -엄마-를 생각하고 분노보다 엄마에 대한 사랑을 쏟음으로 그 순간을 견딜 수 있었다.
홀로 병실에서 생의 마지막 계단을 힘겹게 걷고 있을 엄마가 준 쪽지 “퍼뜩와, 에미 심심해”는 ‘나’라는 존재가 여전히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일깨운다. ‘애자’가 세상에서 소외되었을 때 지금도 여전히 지극히 소중한 존재임을 알려주는 엄마의 쪽지는 ‘애자’를 살맛나게 만들고, 백번을 되풀이 하더라도 엄마와의 시간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고 “엄마, 수술 받고 좀만 더 살다 가, 내가 다 받아주면 되잖아”라고 외치게 만든다.
사랑을 받아보는 것은 사랑을 줄 줄 알게 만들고, 날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일은 내 삶을 가슴으로 살게 한다. 내가 아파지면 나는 가족들에게 짐이 되니까, 사랑하는 그들에게 짐이 되지 않아야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애자’를 보면서 입장을 바꾸게 되었다.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짐이 되었을 때 그 짐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남편은 40대 후반의 정열을 불태우느라 바쁘고 고단하다. 아이들은 다 자랐지만 여전히 상처받기 쉽고, 아직 부모님들은 건강해 보이시긴 해도 언제 기력이 떨어질지, 약국을 하느라 고단한 나는 ‘가족에 대한 내 역할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지나치지 않은 관심과 때때로 무관심이 더 가정의 평화를 준다’고 믿으며 좀 소홀한 아내, 엄마, 자식의 역할에 슬쩍 눈돌려 외면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많이 사랑주고, 가슴으로 안을 줄아는 너그러운 아내, 따뜻한 엄마, 때로 준 것보다 받은 것 많은 세상에 스스러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바라지는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 사람들의 쉼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 빨리 달리는 것만 생각해서 빈 공간을 잃어버린 내게 오늘은 비우는 연습을 하자고 얘기한다. 지금 이 순간 눈을 감으면 훨훨 하늘을 나는 새가되어 더 많이 가벼워져서 비상하는 꿈을 꿀 것만 같다.
몽골지방에서는 낙타가 새끼를 낳으면 산고의 고통으로 인해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물리지 않고 자꾸 내친다고 한다. 그래서 ‘마두금’이라고 하는 악기로 어미 앞에서 연주를 하면 어미는 자신의 산고의 고통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고 생각하여 감사와 회환의 눈물을 흘린 뒤 새끼에게 젖을 물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식에게 온갖 헌신을 다 하면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엄마들에게 ‘애자’와 같이 마음을 치유해 주는 딸과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국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알아주는 ‘마두금’과 같은 안식처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제는 낙타 등껍질처럼 노쇠해진 나의 부모님의 손과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당신의 평생 수고로움에 감사하는 따뜻한 딸의 모습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간절한 소망도 담아본다.
[2010년 8월 31일 제11호 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