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담문학회 엮음/ 파란나무/ 365쪽/ 1만5800원
‘빛이 흐르는 자리’는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온 21명의 여성작가들이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 써 내려간 고백이자 연대의 기록이다.
거칠고 투박한 세상 속에서 어머니로, 아내로, 며느리로, 그리고 딸로 살아가며 본능을 접고 역할을 연기해야 했던 순간들, 그 속에서도 끝내 잃지 않았던 ‘나’라는 존재의 빛을 담담하고도 묵직한 문체로 펼쳐 보인다.
하루아침에 잘려나간 뒷마당의 오래된 나무들로부터 인생의 정서적 울타리를 깨닫는 순간, 새벽 7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어머니를 향한 의무적 다정함에 대한 성찰,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묵묵히 ‘장남과 낀 세대’의 무게를 견디다 떠난 오빠의 된장국, 그리고 지독한 영양결핍 속에서도 들판처럼 피어나던 유년의 꽃 버짐까지,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쓸쓸하고 초라한 인간의 뒷모습을 따스하게 감싼다.
이 책은 지나간 세월을 회상하는 수필에 머무르지 않는다. 상처 입고 해진 서로의 마음을 기꺼이 기워주는 우정과 사랑, 기억 속 얼굴들을 소환해내며 비로소 ‘나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말하는 여성들의 용기 있는 성장 서사다.
낙동강 푸른 물결과 부전시장의 활활 타오르는 붉은 불기둥, 부산역 대기실의 분주한 공기가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인다. 서른 두 해를 견딘 낡은 단독주택의 뒷마당에서부터 요양병원의 가파른 비탈길까지, 작가들이 발을 딛고 서 있던 모든 공간은 그대로 한편의 서사가 된다.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비움과 채움의 조화’이다. 베란다 구석에서 묵묵히 화분 받침대 역할을 하던 텅 빈 달항아리에서 그 안에 머무는 고요를 발견하고, 관절염으로 마디가 굵어진 무릎과 손가락을 보며 ‘낡은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든 것’이라며 스스로를 달래는 시선은 삶을 대한 지혜의 정점을 보여준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내 안에 조용한 응원자가 생긴 듯 든든해 졌다.”고 고백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나이에 상관없이 언제든 새로운 세계를 펼칠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다. 세월의 때가 묻을수록 지혜의 향연이 빛나는 서재의 책장처럼, 이 책은 독자들의 인생 후반전을 환하게 비춰줄 가장 다정한 동행이 되어 줄 것이다.
한편 여성 에세이 앤솔러지 ‘에세이로 읽는 여성서사’는 김민혜 소설가가 기획하고 여담문학회에서 3년에 걸쳐 공들여 엮은 책이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어제보다 환한』(2024년), 『화전수전』(2025년)이 있다.
박정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