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사시사, 오우가 우후요 등 한국 문학사에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시조문학과 부산 그리고 시대정신을 조명해보는 뜻깊은 자리가 마련돼 눈길을 끌었다.
사단법인 부산여성문학인협회가 주최하는 제8회 한국여성문학축전이 7월 18일 오후 5시 부산 수영구 광안해변로 아쿠아펠리스호텔 2층 홀에서 ‘고산 윤선도 기장 유배 400주년 기념 세미나’가 열렸다.
영남권을 중심으로 활발한 문학활동을 해온 부산여성문학인회는 왕성한 집필과 꾸준한 동인활동으로 한국문학계 발전을 선도해오고 있는 단체. 다양하고 지속적이고 꾸준한 문학동인지 발간은 여타 도시의 문학계 추종을 불허한다.
창립 27주년을 맞는 올해 부산 기장 유배 400년을 맞은 고산 윤선도의 시조문학과 지역문화를 돌아보는 자리가 마련돼 ‘역사속 인물에 대한 지역과 문학의 재조명’이라는 측면에서 한국 문학사와 지역문화계에 획을 긋는 역사적인 과업을 남겼다.
사)부산여성문학인협회는 이를 위해 사전에 직접 기장 유배지를 돌아보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열정과 함께 당일 세미나 후 공개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시나리오 나레이터 영상 편집 등 회원이 참여하는 다큐는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발휘해 시종일관 시선을 사로잡았다.
문학상 시상식에 앞서 열린 고산윤선도 기장 유배 400주년 기념 문학 세미나에는 “고산 윤선도의 시조문학과 부산 그리고 시대정신”이라는 주제로 임종찬 시조시인(부산대학교 국문학과 명예교수), 황구 기장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소장, 문학평론가 정영자 한국문인협회 고문이 발제자로 참여하고 손무경 시조시인이 좌장을 맡아 진행을 이끌었다.
고산 윤선도 기장 유배 400주년 기념 문학세미나 눈길
적거소 복원, 문헌사 재정립, 문화 콘텐츠 개발 등 요원
임종찬 교수는 “고산은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와 함께 고전시가의 3대 거봉이다. 당쟁의 소용돌이속에서 서인과 대립한 남인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는 편이어서 유배 및 은거생활을 많이 했다.
그런 면에서 고산의 시조는 자연관은 독특하다. 고산의 자연은 객관화된 대상이 아닌 주관적인 관념화 대상으로 활용되는데 자아가 욕동을 관념적으로 결부시켜 의식적으로 처리하는 방어기제로 자신이 지닌 세계관, 사상, 정서 등을 주체적으로 통제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을 적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같은 측면에서 임교수는 “윤선도 시조에 나타난 자연은 출사지향의지의 매개체, 흥취실현의 공간으로 대별해 볼 수 있는데 작품속에서 이러한 자연의 두 가지 양상이 공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정치 현실에 혐오감을 느낀 윤선도는 자연과 관계를 맺고 자연에서 인간적 가치를 찾고자 했으며, 거기서 진정한 이상향을 체험하고 싶은 마음을 시조로 표출했고, 좌절된 현실지향의지가 시조의 정형을 넘어선 ‘어부사시사’는 창자와 청자가 함께하는 창법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며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드러내거나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기에는 정형화된 시조만으로는 다소 답답함을 느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밝혔다.
고산의 부활 지역사회와 우리의 몫
황구 기장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은“ 고산은 기장을 비롯한 유배지와 은둔지에서 성숙한 문학작품이 이루어졌는데 그의 이런 시문학이 탄생한 배경앞에는30대에 기장 유배생활을 한 6년의 삶이밑바탕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는 “고산선생이 제주도로 옮겨 살 요량으로 가는 길에 풍랑으로 인해 안착한 전남 완도의 보길도는 그가 기장에서 귀양살이할 때 꿈을 꾸었던 유토피아가 실현된 곳”이라며 “자연친화적 조경을 조성하고 고려말과 조선초 인물 양촌 권근 선생이 지은 입학도설의 ‘천인심성합일지도’에 도식화된 ‘심(心)’자를 연상하고 부용동의 세연정을 조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황소장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1748 년 고 산 의 5 대 손 인 윤 위(1725~1756)가 24세 때 보길도를 답사하고 쓴 ‘보길도지’ 책에 윤위는 보길도의위치, 유적지의 배치 등 그때까지 전해오던 고산선생이 인간상과 생활상 등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는데, 특히 보길도는 고산선생이 기장에서 귀양살이하는 중에 얻은 도가적 영감과 자연을 토대로 조성하였다는 기록을 남기도 있는 부분이 뒷받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황구선생은 또 고산선생이 1618년부터 1623년까지 기장 유배중에 지은 글 문집인 ‘고산유고’에 시가 8편 11수, 서는 7편, 제문이 1편으로 6년 동안 머문기간에 비하면 많지 않지만 향후 그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친 기간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황소장은 “이제 지역사회가 고산을 부활시켜야 한다며 기장과 고산의 문헌사 관계 정립과 고산의 기장 적거소 복원 등 기장 죽성리 문화컨텐츠 개발이 요원하다”고 주장했다.
정영자 문학평론가는 “고산이 남긴 다양한 장르의 한문시가와 문장은 당대의 전통과 사상을 나타내어 50대에 들어 꽃피기 시작한 넉넉한 시조시가의 멋과 맛을 내는데 기여했기에 유배 초기 한시와 그의 유배생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인조 1년 계해년 인조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릴때까지 7년의 유배생활중에 6년을 부산 기장 죽성리에서 보냈는데 두호부락을 중심으로 달밭과 왜성에 올라 기장의 아름다운 해안선과 달빛 별빛에 젖고 어선과 어부들을 보면서 호방한 30대의 감성과 정의로운 선비정신이 고전문학사에 빛나는 윤선도의 시조를 창작하게 한 동기가 된다”고 말했다.
그의 시 곳곳에서 죽성리의 바다 성 등 자연과 사람이 오버랩되는 것은 유배 중 많은 서적들을 구해 탐독하고, 어촌마을의 백사장과 해송이 만나는 죽성리 황학대, 용두대 어사암과 학바위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접하며 향후 시작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고산의 ‘어부사시사’의 어부의 삶은 이미 기장 죽성리에서 경험한 어촌과 어부의 삶이 었고 그러한 바다와 관련이 보길도의 자연속에서 다시 재차 느껴진 감성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날 세미나는 시민과 문학인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 문학인들이 되살려낸 역사속 문학인물 고산 윤선도, 권력에 굴하지 않고 돈주고 유배를 풀자는 동생의 간곡함에도 부끄러운 일이라며 단호히 거절했던 고산의 강직한 성품, 고고한 선비정신.
병진년(1616. 광해군 8년) 서른살 정치 초년생 시절 고산이 ‘간신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을 방관하느니 차라리 할 말은 하고 죽겠다’는 각오로 올린 상소문 ‘병진소’에서 드러나듯 그의 기개와 강직한 선비정신은 오늘날 우리의 시대정신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 모아졌다.
유순희 기자
[2018년 7월 27일 제102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