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을 만나다>
추전(秋田) 김화수 화백
추전(秋田), 그가 돌아왔다. 제2의 고향 부산을 떠난 지 꼭 30년만이다.
지난해 말 다시 중앙동에 안착, 추전미술관 간판을 내걸고 '부채그림전'으로 시원하게 컴백신고를 했다.
40여년전 중앙동 대청동 동광동 일대는 물론 부산에서 '추전 서당'을 모르면 그야말로 간첩?이었다.
추전 김화수(66)화백은 한학자이자 서예가로,사군자와 문인화의 대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다.
그의 그림세계는 국내외에서 동양화의 한 맥을 이은 거목으로, 한국적인 기상과 기개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다.
70년대 인문학바람의 주역
당시 대청동 추전서당은 한학과 한문을 배우고자하는 지식인들로 늘 북적거렸고 넘쳐나는 수강생들을 위해 마련한 매주 수요무료시민서당은 인근 신신예식장 계단까지 수강생이 밀릴 정도로 매회 500여명의 시민들이 운집했다.다시 돌고돌아 요즘 새삼 전 세계적으로 인문학 열풍이 거세지만, 이미 70년대부산은 추전이 일으킨 인문학 바람으로 도시가 훈훈했다.
일찍이 4~5세 무렵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운 추전 선생은 김종직 정필재의 수제자였던 조선 성종시절 탁영 김일손의 17대 후손. 집안 백부가 사천군 곤양향교정교로 향교를 일신시킨 어른이고 추전의 사촌 김평수도 향교 정교를 지내 2대에 걸쳐 향교를 지킨 흔치않은 학자 가문이다.
그런 그가 한학과 한문 서예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서예를 하며 사군자를 치고, 사군자에서 다시 동양화로 예술의 지경을 넓히기까지 선비라면 응당 해야 하는 수순을 거친 셈이다. 그러니 일찍이 다도와의 인연도 우연은 아니다. 부산 최초의 다도강사였던 그는 76년 광복동 공간화랑에서 한국다도구전람회를 최초로 열기도 했다.
선비의 맥이은 정통 한학자
추전의 한학은 1960년대부터 한학자 육천 안붕언 선생문하에서 13년간 수학하면서 깊이를 더했고, 한국의 차문화를 부흥시킨 효당 최범술 선생의 수제자로 다법학과 다도학을 배워 정통 다인(茶人)의 맥을 이었으니 현시대 보기드문 선비임에 틀림없다.
그는 또 집필활동도 활발한 문장가다.초창기 주로 다인 연구와 불교문집, 한국정치철학사 등 차와 종교적 색채가 짙었다면 근래들어 소설 주역1,2,3권과 소설진감국사, 소설 의천대각국사와 같은 장편 역사 종교소설을 비롯 선비정신이 오롯이 묻어난 수필집에 이르기까지 문인활동도 활발하다.
부산문예 부흥 일조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경 서경 주역을 비롯 한문 서예 다도 회화에 이르기까지다재다능한 그의 강연 영역 또한 무궁무진하다. 30~40여년전 부산문화를 주도했던 중구일대에서 추전의 강연이 인기를 끈 이유도 해박한 지식과 가늠할 수없는 폭넓은 예술세계의 매력 때문이었을 터. 먹물께나 먹은 사람들은 추전서당을 거쳐 가지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반야심경을 3분만에 내리 써내려가는 완숙도와 국내 서예대가인 청남 오제봉 선생이 그의 필체를 두고'북위 정도소 글씨의 싹을 이었고,중국 청나라 죽화의 대가 양주팔괴인 정판교의 대나무가 다시 푸르렀다'고 칭송할 정도로 서도 세계에서도 이등을 서러워할 정도. 당시 독특한 그의 서체를 일컬어 '추전체'라명명하기도 했으니 그 시대를 공유하지 않았어도 추전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건 가히 짐작할만하다.
부산문인들의 아지트였던 추전서당은 늘 지식인들로 북적거렸고 이렇게 네트워크를 형성한 지인들은 부산문예 부흥에도 일조했다. 1980년 낙동강 탐사대에서 출발한 해양소년단도 추전 서당 에서 머리를 맞댄결과이고 ,70~80년대 부산시립관현악단도 추전이산파역할을 해 탄생하게 됐다. 당시 무용좀 하고 악기 좀 다룰 줄 아는 사람들로 구성, 추전서당에서 멋지게 창단식을 한후 시민회관 소극장에서 관현악단 발표회를 가진 게 첫 출발이었다.
지금이야 부산대 국악과를 중심으로 한 뉴 멤버들이 부산시립 관현악단을 주름잡고 있지만 뿌리는 민중예인들이었던 것을 그들이 알란가는 모르겠다.
제2의 전성기 수도상륙
알음알음 부산지역사회에 명성을 날렸던 추전의 인기는 방송계에서도 러브콜이 쏟아졌다. 당시 MBC자갈치 아지매,홈런출발의 인기에 대응해 제작 편성된 KBS라디오 '오륙도 잠맘경' 프로그램 진행자로 발탁, 2년여간 라디오 진행자로도 인기를 누렸고 대학 역사교육학과에서 맹자학 강연요청도 많아 강단까지 종횡무진하며 정점에 치달은 삶을 살았다.
그런 그가 홀연히 부산을 떠나 문화예술의 중심 서울에서 생활을 과감히 접고왜 다시 지방 부산으로 돌아왔을까. 30여년전 지인들은 지방도시에 가둬놓기엔 그의 꿈이 한없이 크고 재능이 아까워 더 큰 세상에서 맘껏 기량을 펼쳐볼 것을 하나같이 권했다.
하여 추전선생이 훌훌 털고 서울 인사동에서 둥지를 튼 건 1982년. 국내 최고의 유명서점인 통문관 3층에 둥지를 틀고 추전서당 간판을 수도 한복판에 내걸었다. 추전선생은 수도 진출 몇 년 만에 롯데호텔에서 성대한 전람회를 열어 그의 작품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줌으로써 중앙무대에서도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터를 닦으며 제2전성기를 누린 추전선생은 불의와 부정을 두고보지못했다. 부정이 만연하던 대한민국 국전초대작가 진출행태를 보며 청와대 등에민원을 보내 당시 문화관광부로부터 미술 국전을 폐지하겠다는 통보를 받아냈다.
또 91년 당시 부산미술대전 서예부문에서도 시정조치가 발생, 개선할 수 있도록 제기하는 등 미술계 개혁의 선봉에 나서 한 때 절반의 불편한 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승승장구 20년, 그러나 2002년 뇌경색으로 건강을 잃고 그는 고향 경남 사천으로 귀향한다. 그리고 다솔사 밑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1천 평의 차밭을 일구며 건강과 재기를 다졌다. 불과 몇 년 만에 병색을 털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수련과 단호한 의지와 예술 투혼의 결과다.
예술통한 봉사와 기부의 삶
그런 그는 이후 "붓을 들어 한 치의 부끄럼없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작가로서 살겠다"는 신념으로 보란듯이 봉사와 기부의 삶을 살았다. 2007년 불국사 성보박물관 건립기금마련을 위한 무설전 초청전 5천만원 보시,2008년 미주한인청소년재단 기금마련을 위한 초청전시회 150점 5억원 기부 등 대구 지적발달장애우를 위한 기금마련 초대전에 작품을 희사, 3억원을 기부하기도했다.
또 이미 오래전부터 민속씨름대회 출범이후 역대 천하장사들에게 왕죽도를 부상품으로 기증해오기도 했다."한방의학과 약초의 본향 산청군에 신의 유의태 선생과 제자 허준의 일생도를각 24점씩 스토리와 함께 만든 작품은 일생일대 가장 큰 보람"이라는 추전 선생. 20대 청년에서 백발 성성한 노신사로 돌아온 추전의 꿈은 아직도 청춘이다.
"부산에 온지 1년이 다되어가네요. 이제 제3막 인생을 부산서 멋지게 열어 보렵니다. 욕심없는 청빈한 삶을 지향해 가진 건 없지만 재능을 기부하고 아름답게나누며 살아보려구요. 더불어 부산문화가 예전처럼 다시 꽃피길 희망합니다."
유순희 기자
[2012년 11월 19일 제36호 2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