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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 우아하고 품위있는 자리 홍차 어때요?

 
하수잔의 아트 인 라이프스타일 <6>홍차문화의 역사
 

티 테이블의 아름다운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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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음료였던 차가 유럽으로 들어간것은 1598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해서였다. 1662년 찰스 2세가 포루투갈에서 온 캐서린 왕비와 결혼하면서 영국에 차문화가 전해졌다.
 
당시 포루투갈은 설탕 공급을 거의 독점하고 있던 브라질을 식민지화하고 있었기때문에 캐서린은 차와 함께 은과도 맞바꾸던 설탕을 자신이 타고온 선박의 벨러스트(선박의 균형을 잡기위해 싣는 물건)로 싣고 오게 되었다. 그 당시 차는 진귀하고 사치스러운 기호품 이었는데 여기에 또 하나의 귀중품인 설탕을 첨가해 마신다는 것은 상류층의 호화로운 차 취미를 더욱 가중시키게 해주었다.
이에 차문화는 상류계급으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차는 영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18세기 초에는 영국이 차의 최대 소비 국가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세계 홍차의 약 50%를 소비하고 있는 막강한 홍차의 나라이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차란 중국 이외의 토지에서는 절대로 생육되지 않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은 중국이 차의 수출이란 유리한 대산업(大産業)을 타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엄중한 통제 하에 차의 종자, 묘목의 수출을 엄금하고, 재배기술이나 제다법에 대하여도 극단의 비밀주의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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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정청(政廳)이나 동인도 회사는 당시 이 신종 차나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후에 아쌈(Assam)의 신품종 발견은 홍차산업의 커다란 혁명을 초래하였다. 신품종의 차는 찻잎의 크기가 중국종의 3배쯤 되고, 열대기후에 잘 견딜 뿐만 아니라 홍차로 가공하면 종래의 중국차에서 볼수 없는 뛰어난 맛을 내는 우수한 것이었다.
1848년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포춘은 중국 차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중국 상인 또는 몽고 고관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중국을 정탐한 결과, 차의 제조 비밀을 알아내는데 성공한다.그가 훔친 기문종 차의 조자와 묘목은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 북부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임접한 다즐링 지역에서 재배하는데 성공하여, 바로 홍차의 샴페인으로 불리는 다즐링 홍차가 탄생하게 되었다.
현재 스리랑카는 세계적 홍차산지이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섬 최대의 산업은 커피였다. 1841년 수도 캔디 근교에 아쌈종차나무가 재배되기 시작하였지만 본격적인 재배는 보다 나중의 일이었다. 1869년 스리랑카(실론)에 돌연 발생한 병충해로 커피 밭이 전멸하고 신규 식림도
심각하게 오염되어 도민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 때 커피를 대신할 작물로서 등장한 것이 아쌈종의 홍차였다.
 
영국은 차를 중국에서 들여오다 1823년 식민지인 인도 아쌈 지방에서 자생의 차나무를 발견했고 1839년에는 최초의 아쌈홍차가 런던의 차경매 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름바 "대영제국 홍차"의 탄생이다.1860년대 인도에서 대량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차는 일상적인 기호품이 되었고 아침 식사 때 포도주나 맥주를 마시던 오랜습관이 없어지고 모닝티를 대신 마시게 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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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원래 신사계층의 사교적인 삶의 한 양식이었던 차문화는 일반가정에 뿌리내리면서도 에프터눈티에서 볼 수 있듯이 영국의 격식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영국에서 홍차가 국민 음료수가 된 까닭은?
 
역사적으로 외래 음료 가운데, 차보다도 커피가 영국에 먼저 보급되었지만, 커피의 공급확보라는 국제경쟁에서 영국이 패하기도 했고, 유럽 다른 대륙과는 달리 영국의 물이 차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또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와인문화권에는 차가 파고 들어갈 여지가 없었던 것에 반해, 전통적인 음료가 그리 많지 않았던 영국에서서는 비교적 쉽게 확산될수 있었던 것이다.
 
/글 하수잔·사진 함지원
[2013년 7월19일 제4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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