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막한 산들을 테두리 삼은 소박한 섬진강이 눈앞에서 흐른다. 창가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수시로 날아드는데, 햇살마저 따사로이 등을 어루만진다. 여기에 평온한 클래식 음악과 그윽한 커피 향까지 더하면 마음도 가만히 누그러진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함께 책을 펼치면 된다.
지난해 11월에 문을 연 ‘섬진강 책 사랑방’ 이야기이다. 그사이 구례명소로 자리 잡은 이곳은 지난 봄꽃의 향연에 이어, 이제 시작될 여름의 짙푸른 녹음 등 사계절의 자연이 그대로 꾸밈없는배경이 되는, 외양은 모텔이요 내부는 전국 규모인 헌책방이다.
책 사랑방 2층
부산 헌책방 40년 열정, 섬진강 변에서 다시 꽃피워
전라남도 구례군 섬진강로에 위치한 ‘섬진강 책 사랑방’ & ‘북카페 선’은 구례구역에서 걸으면 10여 분 정도 걸린다. 유동인구가 적고 한적한 곳인 데다가 교통편도 애매하지만, 책방은 이제 구례군은 물론 국내에서 보기 드문 책문화공간으로 하루하루 거듭나고 있다.
처음 책방을 대면하는 사람은 우선 그 외양에 조금 당황할 수도 있다. 너른 마당을 갖춘 3층짜리 옛 모텔 전체가 개조돼 책방 겸 북카페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여느 책방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이 커다란 건물을 책으로 빼곡히 채우는, 엄청난 일을 해낸 사람은 바로 ‘섬진강 책 사랑방’ 김종훈(69) 대표이다.
“구례로 와서 좋은 것은 자연”이라면서 “저녁에 책방 영업을 마치고 강변을 따라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는 시간이 정말 좋다”는 그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유명한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40년 넘게 ‘대우서점’을 운영해온 헌책 도사이자 책방골목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책 사랑방 1층 북카페 '선'
대우서점은 1978년 소규모 헌책방으로 출발해 별다른 도움 매체없이 책으로 공부하던 1980~90년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수십만 권의 책을 보유한 보수동 최대규모의 서점이었다. 인문, 교양서적은 물론 대학의 전공서적, 원서 등 수많은 책들이 지하부터 천장까지 쌓여있는데도 고객들이 원하는 책을 귀신같이 척척 찾아주는 김 대표의 노하우는 기인에 가까웠다.
수십 년 단골들이 책과 함께 그와 정을 쌓았고, 열혈 독서인들은 ‘대우독서회’라는 책모임을 만들어 8년째 이어가고 있다. 대우서점이 구례로 떠난 후에도 독서회원들은 그간의 독서력을 바탕으로 생업 이외에 여러 문화공간의 강사로, 독서 리더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헌책 시장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직접 서점을 찾아 책을 고르는 발품보다는, 대형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하는 독자들이 늘고, 헌책의 수요는 갈수록 주는 위태로운 시간을 견디다 대우서점 40년의 막이 내렸다. 주변에선 평생 책방을 운영하셨으니 이제 좀 쉬시겠거니 예상을 했지만, 김대표는 오히려 일을 훨씬 더 크게 벌이고 말았다.
책 사랑방 3층
그는 책방을 정리하기 위해 구례와 하동을 오가다가 섬진강 변에 있는 한 모텔을 보고 ‘여기다’ 싶었고, 부산 헌책방 40년의 정리 작업과 동시에 모텔을 책방으로 변신시키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 책만 해도 1톤 트럭으로 30회 넘게 구례로 실어날랐다. 이 초인적인 힘과 추진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에게 “책이 곧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 와중에 지난해 여름에는 섬진강이 범람하는 가혹한 홍수로 수 만권의 책들을 잃는 시련도 겪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준비한 끝에 헌책방의 제2막을 구례에서 일궈냈다. 책방옥상에 가면 지금도 겨우 건져낸 희귀본들이 당시의 전쟁같은 상황을 말해 주듯 누워있다. ‘섬진강 책 사랑방’ 문을 열면서 또 수많은 책들을 공수해 책방을 채웠지만 김 대표 입장에선 아쉬움이 크다.
“부산 보수동에 있을 때는 책이 너무 빼곡해서 여유가 없었는데 책을 채워도 공간이 넓다 보니 여유가 있어 좋다”면서도 “책의 퀄리티가 수해를 당하기 전과 같지 않다”며 아쉬워 했다. 하지만 지금도 헌책을 공수할 곳이 있다면 어디든 직접 트럭을 몰고 나서고 있기에 예전 못지않은 귀한 책들이 책방을 차곡차곡 채워 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전해왔다.
책에 목마른 독자들 전국에서 찾아 오다
시련을 이겨내고 지난해 11월 ‘섬진강책사랑방’ & ‘북 카페 선’이 총 3층 규모로 문을 열었다. 코로나19 여파로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지도 정식 개업식을 진행하지도 못했지만,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김 대표와 40년을 함께한 단골, 지인들이 찾아와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지금은 전국 방방곡곡의 손님들이 섬진강의 책 향기를 맡고 찾아오고 있다. 홀로 와서 몇 시간 책을 읽고 가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가다 들르는 사람, 가족, 친구 단위로 찾아온 이들이 수만권 책 숲을 헤맨다.
책방 1층에는 시각 예술, 동서양 철학서, 한국사, 어린이 도서 등이 자리하고 있다. 북카페랑 겸하고 있으며, 책방의 박선희 안주인이 직접 커피를 내리고 차를 만든다. 책방이라고 커피 맛을 기대하지 않았다가는 정성스럽고 부드러운 커피 맛에도 살짝 감동할 수도 있다. 2층은 본격적인 인문, 교양서적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시, 소설, 에세이, 철학 등등의 책이 가득하다. 눈앞에 흐르는 섬진강을 창으로 보면서 책을 고르거나 독서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3층은 원서, 양의, 한의학, 대학 전공서적 등 다소 어려워 보이는 전문교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여기서도 자신에게 필요한 책을 매의 눈으로 가려내는 손님들이 있다.
김 대표는 “구례군의 인구는 많지 않지만 토박이 주민뿐만 아니라, 귀농하신 분들도 있어서 시골에 헌책방이 생기자 너무들 반겨주시고 고마워하신다”고 말했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어디 독자뿐이랴. 작가들도 어떻게 알고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와 주었다. ‘사평역에서’의 곽재구 시인, 최근 새 시집을 낸 박남준 시인, 곡성에 거주하면서 작품활동을 하고있는 김탁환 소설가 등이 다녀갔다.
책모임, 다양한 프로그램열리는 문화공간 희망
소나무 탁자
책방 1층, 한곳에는 10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소나무 탁자가 놓여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임에 토론도 할 수 있도록 김 대표가 야심차게 준비했다. 탁자는 소나무 향내를 풍기면서 코로나 이후 찾아올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김종훈 대표는 귀한 헌책들을 바탕으로 수시로 책 전시를 열 계획이다. 또한, 독서 동아리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장소 제공과 함께, 강연, 교육, 책나눔 등등의 행사도 펼쳐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면서 책방이 지역 주민과 호흡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그의 새로운 꿈이다.
김 대표는 “코로나19만 아니면 좀 더 많은 분들이 와서 책과 함께 여유롭게 쉬고 가실 텐데 아직은 제약이 있다”면서 “학생들이 단체로 와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고, 어느 특정 연령대에 국한되지 않는 열린 공간으로 행복을 선사해 줄 수 있는 책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책 사랑방 전경
번잡한 도시를 떠나 구례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한적한 강가에 반갑게 자리하고 있는, ‘섬진강 책 사랑방’에 꼭 들러보길 추천한다. 여행길에 뜻밖의 인생 책을 만날 수도 있고, 가끔 다시가고 싶은 그리움의 장소가 되기에 충분한 곳이다.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 섬진강로 46 섬진강 책 사랑방 (061-782-3820) 영업시간 매일 10:00~20:00 / 매월 첫째, 셋째 수요일은 휴무.
박정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