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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저/여행

강원도보다 작은 악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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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동티모르 대사관의 김수일 대사로부터 초청장이 왔다. 우리나라 강원도보다 작은 섬나라 동티모르. 한 장의 초대장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과연 이 조그만 섬나라에 대해 관심조차 있었을까. 초청을 받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티모르섬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동티모르에는 우리의 단군신화처럼 ‘악어’와 ‘소년’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티모르섬이 된 악어 이야기
동티모르는 말레이제도 동쪽 끝에 위치한 티모르섬의 동부와 서티모르 북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신생독립국으로, 우리나라의 강원도보다 적은 면적의 조그만 섬나라다. 모양이 악어를 닮아 악어섬이라 불리는 티모르섬. 그 동부는 울퉁불퉁한 산악지대로 동티모르인들이 산신이라 믿는 해발 2,963미터의 영산 라멜라우(Ramelau)가 고원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호주와 인도네시아가 통치하는 여러 섬에 둘러싸인 이곳은 숲으로 뒤덮인 산과 넓은 구릉이 줄지어 있는 전형적인 열대사바나 지역이다. 호주 내륙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사막열풍의 영향을 받아 건기 때는 섬 전체가 흙먼지로 자욱하고 더위와 갈증에 지쳐죽는 가축들이 생길 정도다. 반면에 우기 때는 서쪽으로부터 습한 바람이 불어와 폭우가 쏟아지고 홍수가 발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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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장벽, 풀어야 할 숙제 
국민의 대다수는 말레이인, 파푸아인, 폴리네시아인 혼혈이며 테뚬족, 맘바이족, 갈롤리족 등 36개 이상의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만큼 언어도 다양하여 이것이 동티모르에 산적한 숙제들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오랜 식민지 역사를 가진 동티모르의 공용어는 테뚬어와 포르투갈어다.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언어는 테뚬어지만 정부의 공문서와 교과서는 모두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다. 반면에 인도네시아 통치시절 학교를 다닌 세대는 인도네시아어를 구사한다. 실제로 동티모르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생필품을 인도네시아로부터 수입하고 있어 아직까지도 인도네시아의 경제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여기에 각 지역별로 지방어가 15개가 넘다보니 현지인들 간에도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작은 땅덩어리에 언어의 혼란으로 인해 존재하는 교육과 취업, 지역갈등은 동티모르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로 남아 있다.
동티모르는 지배와 침략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515년 포르투갈 선교사에 의해 발견된 티모르섬은 1520년경 포르투갈인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네덜란드인이 들어와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것은 이 섬이 백단향(白檀香)의 주요산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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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단향은 은은한 향내가 나고 실내에 모기나 파리 등 해충의 접근을 막아주어 귀족의 저택이나 값비싼 가구를 만드는 목재로 사용되었다. 특히 향이 짙은 뿌리부분은 향료 조각 세공품을 만드는 데 쓰였다. 17세기 이후 동남아로 진출하는 유럽인들의 주요목표는 향료무역을 독점하는 것이었는데, 그 으뜸상품이었던 백단향의 주산지가 바로 티모르였다.
이렇듯 향료를 둘러싼 다툼 끝에 1913년 티모르는 포르투갈령의 동과 네덜란드령의 서로 분할되었다. 그후 서티모르는 1945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완전 독립하면서 인도네시아 영토로 귀속되었고, 동티모르는 1975년까지 450년간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다가 2차대전시 일본군에 점령당하기도 했다(1942~1945년).
 
당시 일본군은 태평양지역 제해권과 호주 침공을 위한 발판으로 이 섬을 활용했으며, 이때 동티모르 주민 6만여 명이 학살되었다. 1974년 포르투갈 정부는 독립을 약속하고 이듬해인 1975년 11월 마침내 동티모르는 독립을 선언했으나 티모르해에 매장된 유전을 노린 인도네시아군의 침략을 받아 1976년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강제 합병되었다.
 
그뒤 동티모르 사람들의 끝없는 독립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인도네시아 감옥에 투옥되었다. 훗날 초대 대통령이 된 샤나나 구스망도 산속에서 동티모르 민족해방군을 조직해 17년간 게릴라로 무력투쟁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동티모르 방문과 이듬해 인도네시아 주재 미국대사의 수도 딜리 방문은 독립을 갈망하는 동티모르인들의 의지가 전세계에 알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91년 11월 딜리에서 인도네시아에 항쟁하다 숨진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산타크루즈에 모인 동티모르 평화시위대에 인도네시아 보안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최소 250여 명 최대 903명이 사망한 ‘산타크루즈묘지 대학살사건’ 이후 동티모르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총격장면이 당시 현장에 있던 외신기자의 카메라에 담겨 전 세계에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1996년에는 훗날 2대 대통령이 된 동티모르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주제 하무스오르타와 카를루스 벨루 주교가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하면서 동티모르 사태는 다시 한 번 국제사회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 8월 유엔의 감시 아래 실시된 국민투표를 통해 2002년 독립한 동티모르는 4월 실시된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독립운동지도자 구스망을 선출하면서 21세기 최초의 독립국가로 국제사회에 등장하게 되었다.
 
샤나나 구스망은 1999년 유럽의회가 주는 사하로프 인권상을 받았고, 2000년에는 한국의 5.18기념재단이 인권과 평화를 위해 공헌한 국내외인사들에게 수여하는 제1회 광주인권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2007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했으며 2007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총리로 재직하고 있다.
 
현 대통령은 주제 하무스오르타에 이어 2012년 대선에서 당선된 타우르 마탄 루악이다. 그러나 동티모르는 여전히 독립에 반대하는 서티모르 출신의 친 인도네시아파 민병대의 반란과 권력분쟁으로 인해 2006년 쿠데타가 있었으며, 2008년 2월에는 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 주제 하무스오르타는 오전 산책을 하고 돌아오다가 딜리에 있는 자신의 집 밖에서 저격당해 중상을 입었지만 2개월 만에 기적적으로 살아나 대통령 임무에 복귀했다고 한다. 혁명영웅 샤나나 구스망은 독립투쟁의  영웅이었지만 권력을 쥐고 독재자로 변질되어갔다. 그틈에 외세가 들어왔고 평범한 일상은, 독립 전후와 다름이 없다.

글/도용복. 오지여행가
글/도용복. 오지여행가
20151224일 제 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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