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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저/여행

도미니카 공화국 거리 곳곳에 콜롬버스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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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83. 120명의 승무원을 태운 세 척의 배가 스페인 파로스 항구를 출발하였다. 동쪽 나라의 고급 향신료와 금을 얻기 위한 콜럼버스의 항해가 시작된 것이다. 항해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구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에도 교섭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여러 번의 제안 끝에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항해는 쉽지 않았다. 대서양은 미지의 검은 바다였고, 금방 도착할 것 같은 동쪽 나라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오랜 항해로 지친 선원들의 반발도 심해졌다. 배가 출항한지 두 달이 지난 1012일 마침내 배는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인도의 한 곳에 도착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신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이 섬을 산살바도르 섬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곧 원주민들로부터 황금과 향료에 대한 정보를 캐면서 쿠바 섬을 거쳐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히스파니올라 섬. 도착한 날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신의 날, 일요일이란 뜻의 라틴어 <디에스 도미니카>를 따서 도미니카로 불렀다.

쿠바보다 도미니카 공화국을 콜럼버스의 나라라고 하는 이유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최초의 식민 도시를 만든 곳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도미니카 공화국의 거리 곳곳에는 콜럼버스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콜럼버스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첫 발을 내리고 정착해 처음 세운 도시가 현재 제 2도시인 산티아고 근교의 이사벨라. 막대한 항해 자금을 지원해준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사벨라라는 여인을 사모하는 노래 프랑스의 유명 샹송가수 샤를르 아즈나부르의 이사벨라(Isabelle)’라는 노래 가사처럼 콜럼버스가 이사벨라 여왕을 사모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20099월 어느 날 콜럼버스가 최초로 정착했던 역사의 현장, 이사벨라를 찾았다. 대서양의 아름다운 풍광이 보이는 이사벨라엔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여전히 푸른 나무와 열매가 자라고 있었다. 매표소에서 100페소를 지불하고 유적지로 들어서자 콜럼버스가 식민지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만들었던 도시는 황망하게 터만 남아 있다.

콜럼버스의 1차 항해에서 이곳 이사벨라에 39명의 선원들을 남겨 두고 떠났다. 하지만 17척의 배에 1,200여 명의 사람들을 모아 다시 이곳에 돌아왔을 때 남아있는 선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선원들의 약탈과 강간에 화가 난 원주민 타이노족들에게 몰살당하였던 것이다. 신식 무기를 앞세운 유럽인들은 타이노족들을 노예로 삼아 1494년부터 이사벨라를 도시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이 감옥과 창고, 그리고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관리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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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는 견고한 성벽과 무기고, 교회, 대저택까지 갖춘 거대한 도시가 될 예정이었다. 석회와 모래, 시멘트를 섞어 벽돌을 만들고, 건물의 지붕에 올리는 기와는 주물로 만든 틀이 없어 원주민들의 허벅지에 올려 둥그스름하게 만들었다. 배에 사용하던 못이나 기구들도 직접 제작하였다. 콜럼버스가 머물 집과 선원들이 머무는 집도 200여 개가 넘었다. 그렇게 아메리카 최초의 도시, 최초의 교회, 최초의 미사 등이 이사벨라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최초의 식민도시 건설은 실패하였다. 이사벨라의 몰락에는 많은 원인이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적응에 실패한 것이다. 1496년 이주민들은 시련에 봉착했다. 작물은 자라지 않고 금도 나오지 않는데다 생필품까지 바닥을 드러냈다. 부족한 식량에 주민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고 극단적인 상황에서 절망과 고통에 쌓여갔다. 수많은 개미와 벌레 떼들이 이주민들이 이사벨라에서의 정착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적응에 실패한 콜럼버스 일행들은 개미에 쫓겨 결국은 식민도시를 현재 수도인 산토도밍고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원주민 타이노족들도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려가고 유럽인들이 옮겨온 질병으로 죽어갔다.

이사벨라에는 당시의 식민 개척의 흔적을 보여주는 오래된 유적들만이 남아 있었다. 시청 청사였던 자리에는 기둥을 세웠던 네모난 터만 남아있고, 마을을 이루었던 곳에는 200여 개의 집터와 우물, 최초 미사를 지냈던 곳엔 십자가와 돌담만이 있을 뿐이다.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무덤들이었다. 수많은 에스파냐인들의 무덤과 타이노족의 무덤은 발굴자에 의해 파헤쳐진 몇몇 무덤을 제외하곤 오랜 세월 비바람에 흔적 없이 사라져 십자가만이 시신이 묻힌 자리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에스파냐인들은 가톨릭의 장례에 따라 두 손을 가슴에 올린 채 누운 채로 매장이 되었고, 원주민들은 무릎을 굽힌 채 두 팔로 무릎을 감싸안은 모습으로 묻혔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이사벨라의 실패를 거울삼아 훗날 아메리카에 성공적인 식민도시를 건설하였다. 산토도밍고가 대표적이다. 산토도밍고는 유럽인들이 처음 정착을 한 곳으로 아메리카 대륙 최초라는 타이틀을 많이 가지고 있는 곳이다. 크지 않은 조나 꼴로니알(Zona Colonial, 식민지 구역)에는 역사적인 건물들이 가득하다. 광장과 성당의 모습만을 보면 유럽의 오래된 도시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조나 꼴로니알의 중심에 콜럼버스 공원이 있고 광장의 중앙에는 콜럼버스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동상보다 더 유명한 것이 동상 뒤편에 있는 산타마리아 라 메노르 성당(Catedral de Santa Maria la Menor)이다. 아메리카 대륙 최초로 만들어진 성당이기 때문이다. 1512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540년에 완공된 산타마리아 성당은 지금의 중남미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교회와 성당의 시초가 된 곳이다.

콜럼버스 공원을 중심으로 이곳에 만들어진 최초의 거리이자,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인 라스 다마스 거리에는 콜럼버스가 기거했던 저택과 최초의 대학과 병원,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주점도 남아있다. 보존이 잘되지도 유럽의 고도의 건물처럼 화려하지도 않지만 아메리카 개척 역사의 시작이 된 곳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콜럼버스가 도착한 이후 타이노족들은 멸망하고, 흑인 노예들과 백인들이 점령했다. 지금 도미니카 공화국엔 이들의 후손인 흑백혼혈 물라토들이 인구의 대부분이다. 야구를 사랑하고, 음악과 춤을 사랑한다. 내가 만난 도미니카 사람들은 전부 낯선 사람에 대한 거리낌이 없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부유하진 않지만 도미니카 공화국 사람들은 행복하다. 콜럼버스 광장에서 하늘을 가리키는 콜럼버스 동상을 바라보며 물어본다. ‘당신은 어땠습니까? 이곳에서 당신은 행복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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