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11월 21일

레저/여행

세상 끝 남단 마을 ‘푼타아레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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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새벽 비행기로 푼타알나스로 간다고 했지요? 옷을 그렇게 입고 가면 얼어죽어요. 이 지도 좀 봐요. 남극 대륙처럼 온통 새하얗지요. 남미 대륙 땅끝 마을 푼타아레나스는 눈과 얼음에 덮혀 있다구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의 한국식당 남산정주인인 충청도 아줌마가 걱정스럽게 얘기하더니 금방 옷가지를 한아름 안고 내 방으로 왔다. 남편이 입던 위아래가 이어진 방한복에 에스키모들이 입는, 털 달린 모자가 붙은 파카였다.

이튿날 새벽 방한복을 껴입고 파카는 벗어든 채 푼타아레나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두어 시간 남쪽으로 날아가 푸에르토몬트에 기착하자 승객들이 거의 다 내리고 좌석에 남은 사람은 6~7명에 불과했다. 다시 남쪽으로 두어 시간 날던 비행기가 고도를 낮출 때 바깥을 내다보니 땅이 새하얗기는 커녕 검푸르기만 했다. 마침내 비행기는 허허벌판에 착륙했다. 또 중간 기착지에 멈췄구나 생각하며 무심코 둘러보니 다른 승객들은 모두 내리고 나 혼자뿐이었다. 스튜어디스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손님 내리시죠.”“나는 푼타아레나스까지 가야 하는데요.”“여기가 푼타아레나스예요.”

칠레에는 하도 푼타로 시작하는 지명이 많아서 티켓을 보여주며 똑똑하게 아레나스를 강조하자 스튜어디스는 그래요. 여기가 바로 푼타아레나스예요하는 것이다. 순간 이럴 수가 있나. 눈송이 하나 얼음 한 조각 없잖아!’하고 속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얼어죽을까봐 겹겹이 옷을 껴 입고 털모자에다 파카를 옆구리에 끼고 오리걸음으로 트랩을 내리자니 뒤꼭지에 따가운 시선의 화살이 꽂히고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땅이라더니 볼을 간질이는 산들바람에 땅에는 노란 들꽃들이 피었고,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눈과 얼음은 보이지 않았다. 남산정 아줌마의 과잉친절이 내게는 망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푼타아레나스에 와보지도 않은 사람에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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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란 해협의 변에 있는 조그만 어촌 푼타아레나스도 한때는 하루가 다르게 번창한 적이 있었다. 상점들이 들어서고 술집은 목마른 뱃사람들로 왁자지껄하고 바람따라 굴러온 헤픈 여인들은 훌렁훌렁 치마를 벗었다. 하지만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자 색시 떠난 술집처럼 마젤란 해협은 뱃길이 끊어지고 푼타아레나스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아직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남미대륙의 남쪽 끄트머리 땅끝마을에 남아 있다.

바로 이곳에 우리 동포 일가족이 살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노승만씨 일가족. 그는 농수산회사 기지장으로 이곳 마젤란 해협에서 조그만 배 두 척으로 홍어잡이를 하며 살고 있다. 물어 물어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다시 밴 트럭을 타고 그의 집으로 갔다. 잿빛 바다가 출렁이는 마젤란 해협 변의 조그만 오두막집은 멀리 고국에서 온 이 떠돌이 여행객을 손님으로 맞느라 분주했다.

콤콤하게 익은 홍어찜에 칠레 독주 피스코잔이 몇 순배 돌자 노승만씨는 여기까지 흘러온 사연을 털어놓았다. 라스팔마스에서 원양어선 선장으로 있다가 누님의 중매로 아리따운 신부를 얻은 이 노총각은 배타는 게 지겹고 신부 곁을 떠나는 게 죽도록 싫었다. 결국 선원수첩을 아궁이 속에 버리고는 서울의 갈현동에 가전제품 가게를 연다. 그러나 바다에서 고기만 잡던 어리숙한 그가 사업을 잘 할 리 만무였다. 업종을 완구점으로, 다시 생맥주집으로 바꾸었지만 제대로 되는 게 없어 결국 집을 팔고 아파트로, 그리고 전세로 옮기는 동안 살림은 줄어 들어갔다.

결국 성남의 사글세집에서 외판원이 되었을 때 그는 폭음을 일삼고 부인과는 매일 밤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내 그토록 싫어서 태워버린 선원수첩을 다시 만들어 홀로 라스팔마스로 간다. 어느 해 봄, 초등학교에 입학한 막내딸 민경이의 편지 한 통을 받은 그는 대성통곡을 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어디를 간들 어떠리. 우여곡절 끝에 그는 가족과 함께 남미대륙의 땅끝마을까지 흘러들게 된다.

홍어회에 취하고 노승만씨의 인생역정에 취한 나는 화장실에 가다가 굴러다니는 골프공을 발견했다. “이곳에서 골프공은 뭐에 씁니까?”“골프 칠 때 쓰지요”“여기도 골프장이 있습니까?”“바로 길 건너가 골프장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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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대로 정말 골프장이 있다. 푼타아레나스 칠레 해군기지 골프코스는 10홀에 불과하지만 중복되는 8개홀은 티잉그라운드가 서로 달라 18홀이나 진배없다. 완만한 언덕을 넘으며 잘 가꾸어진 페어웨이, 남극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이겨낸 꿋꿋한 소나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마젤란 해협...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던 푼타아레나스에서 파릇파릇한 잔디 위로 백구를 날렸다면 충청도 아줌마가 믿어줄까? 내 평생 가장 남쪽에서 친 골프요, 모르긴 몰라도 노승만씨와 떠돌이 골프광이 지구 최남단에서 골프를 친 것, 그것도 마젤란 해협으로 골프공을 날린 단 두 사람의 한국인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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