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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저/여행

유럽의 향기, 아랍의 가슴, 터전은 아프리카인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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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인트 루이스 성당. 세인트 루이스 왕을 기념하여 1892년에 건립하였다.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지리적인 관점에서 튀니지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있다. 바로 머리는 유럽에, 가슴은 아랍에, 발은 아프리카에라는 말이다.

지리적으로 위로는 유럽, 아래로는 아프리카를 밟고 서서, 오랜 아랍의 지배를 통해 언어와 문화, 종교 등의 생활은 아랍의 일원이 되었다.

튀니지의 공식언어는 아랍어지만 프랑스 식민지였던 까닭에 제2국어로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헌법에서 종교가 이슬람교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는 이슬람 국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도록착용과 일부다처제를 법으로 금지하고 술의 판매가 공개적이진 않지만 가능하다.

또한 이슬람 나라들이 목금요일이 주말인 것과 달리 유럽처럼 일요일을 공휴일로 하고, 돼지고기를 먹는 등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유연하고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 거리에서 만나는 튀니지 국민들도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나 두려움이 없다. 낯선 것에 대한 거리낌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프리카에서 만나는 유럽의 향기

 

튀니지 수도 튀니스Tunis는 기원전 2천년경에 세워진 도시지만 지금은 현대적으로 개발되었다. 중심부에 옛 시가지 올드메디나가 있고, ‘북아프리카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인 프랑스풍의 거리, 이슬람 모스크, 카르타고의 고대유적과 더불어 지중해의 상쾌한 바람이 공존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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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 튀니스는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어 시내를 도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튀니스의 신시가지에 들어서니 유럽의 도심을 거니는 기분이다. 도로가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어 여기가 아프리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운타운인 하비브부르기바거리에는 유럽차들이 대부분이고, 거리표지판은 아랍어와 프랑스어가 함께 적혀 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잔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차도보다 넓은 부르기바대로의 보행자전용길은 파리의 샹젤리제거리와 많이 닮았다. 두 줄로 길게 늘어서서 아프리카 태양의 그늘막이 되어주는 가로수도 그렇고, 인파로 넘실대는 넓은 보행로도 그렇고, 멀리 보이는 개선문과 비슷한(?) 바브 엘 바흐르Bob el Bhar도 그렇다.

빅토리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이 아치형의 큰 문은 프랑스문Porte de France이라고도 불린다. 이 프랑스문이 구시가지인 메디나와 신시가지를 나누는 기준점이자 부르기바광장(또는 87117일광장이라고도 한다.

2대 벤 알리 전 대통령의 취임날짜에서 따온 이름)의 시계탑에서 시작된 부르기바대로가 끝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로변으로는 극장, 은행, 고급부티크, 카페 등 유럽풍의 아르맏운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카페의 실외자리엔 여유를 즐기는 관광객과 시민들이 가득하다.

 

바브 엘 바흐르 너머 20세기초 튀니스의 중심지였고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구시가지 메디나와 전통시장 수크가 있다. 미로같이 얽힌 좁은 길이 이어지고 길목에는 붉은색 펠트모자를 쓴 할아버지들이 오가고 있다. 그늘진 투박한 길은 수크로 이어지는데 수십 개의 골목에는 튀니지의 전통인형과 도자기, 공예품들이 그득하다.

 

시장골목 한가운데로 들어서면 튀니스를 대표하는 메디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투나모스크Zitouna mosque가 나타난다. 지투나는 올리브나무를 뜻하는데 역시나 튀니지는 세계에서 올리브 생산이 두 번째로 많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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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니지는 전세계 올리브 생산국가 중에서 첫 번째로 큰 면적의 올리브 농장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두 번째로 많은 올리브 오일을 생산하고 있다.

1,300여 년의 긴 역사가 담긴 지투나모스크는 유럽과 로마, 카르타고 등 지중해문화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독특한 모습이다. 수크 어느곳에서 바라봐도 우뚝 솟은 사각형 기둥의 미나레(첨탑)를 찾을 수 있다.

    

 

비르샤언덕에서 옛 카르타고의 영광을 회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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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로마를 정복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흔적을 느껴볼 수 있는 카르타고 비르샤 언덕

튀니스에서 관광객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카르타고다. 물론 지금의 카르타고는 당대의 번영을 느낄 수 있는 유적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현재는 잿더미가 되어버린 카르타고 위에 다시 건설한 로마유적 일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는 로마를 벌벌떨게 한 명장 한니발의 위용이 그 전설과 함께 남아 있는 듯하다.

 

적이 바로 코앞에 와 있다는 뜻의 라틴어 속담 한니발이 문 앞에 있다(Hannibal ad portas)"라는 말은 한니발 때문에 생긴 속담인데, 이 말은 로마멸명 때까지 우는 아이를 어르는 효과적인 방편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내 어린시절의 "순사 온다"라는 소리랑 똑같은 거다. 일제시대 순사의 위력처럼 그 시절 로마인들의 뇌리에 한니발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긴 로마시대 전체를 통틀어 한 개인이 대제국을 이토록 공포에 떨게 한 적은 없었기에 그에 대한 로마인의 두려움과 경외는 남다른 듯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카르타고의 중심지였던 비르샤언덕에 오르면 옛 이야기의 흔적은 모두 지워지고 현재는 로마 안토니우스황제목욕장의 잔해만이 남아 옛 시절의 무상함을 일깨워준다. 로마인들의 목욕장은 정치와 사교의 장이기도 했으니 늘 화려하고 대단하긴 했지만 이곳의 규모는 정말 어마어마했나보다.

지하부분과 지상의 기둥이 조금 남아 있는 게 고작이지만 뿌리만 남은 기둥이 어른 키만한걸 보면 높은 기둥이 15미터였다는 기록이 틀림없는 사실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런 화강암 기둥 8개가 떠받친 돔천장의 냉탕을 본 적이 있던가. 이 시대에도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냉탕과 열탕, 사우나실 등 화려한 방이 가득한 거대목욕장은 로마시대에 두 번째로 큰 목욕장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 카르타고의 유적을 꼽자면 토펫tophet이라는 어린이들의 집단무덤이다. 끔찍하게도 카르타고에서는 국가적 재난이 있을 때 대규모 인신공양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장 대규모였던 것은 기원전 310년 시라쿠사의 참주 아가토클레스의 침공 때였다. 카르타고 멸망 당시 로마군은 어린아이의 혼령이 자신들을 저주할 것이 두려워 이것만은 파괴하지 못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도 있다.

    

 

로마시절 이프리키야의 모습

 

로마속주 시대의 튀니지는 화려하고 정교한 모자이크와 도기공업으로 다시 유명해졌다. 로마화가 진행되어 국제적인 분위기의 도시로 탈바꿈했고 제국의 공용어인 라틴어와 함께 페니키아어, 베르베르어도 사용되었다. 또한 빵바구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로마제국의 곡창지대로 기여하며 대농장 라티푼디움에서 밀이 풍부하게 생산됐고 올리브 또한 대표적인 수출품이었다.

이 시절 정교한 모자이크와 도기를 볼 수 있는 이색적인 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모자이크 전시장이라는 바르도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서는 일일이 색돌을 쪼개맞추어 만든 훌륭한 모자이크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런 전통이 있어 지금도 시내 어디서나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접시나 기념품들을 볼 수 있나보다.

 

튀니지에서 한 곳 더 로마시기의 유적을 볼만한 데는 튀니지내륙, 튀니스에서 남쪽으로 2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엘젬Eljem이다. 인구 7,000명의 이 작은 도시 중심에는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이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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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스에서 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엘젬에는 로마시대에 세운 원형경기장이 있다.

 

로마의 건축물 중에서 로마의 콜로세움과 카푸아극장 다음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엘젬의 콜로세움은 높이 35미터, 둘레길이 427미터로 35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지하에 먼 이국땅에서 잡아온 맹수들을 가둬두었다가 검투사와 싸움을 벌이게 했을까, 아니면 기독교도 박해시절 그들을 물어뜯게 했을까. 정말 이렇게 수많은 객석의 관중들이 그걸 스포츠로 즐기며 환호한 게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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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43000명의 관객을 수용했다는 길이 148미터, 높이 36미터의 거대한 규모다.

지금도 여름밤이면 콘서트가 열린다고 한다.

 

가운데 경기장을 중심으로 동쪽의 관객석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나 서쪽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17세기 가혹한 세금징수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반란을 꾀했고, 이 과정에서 원형경기장을 방어요새로 삼았다 한다. 모하메드베이의 군대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서쪽벽에 구멍을 뚫으면서 심하게 손상됐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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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경기장을 중심으로 동쪽의 관객석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나 서쪽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17세기 가혹한 세금 징수에 불만을 품을 주민들이 반란을 꾀했고원형경기장을 방어요새로 삼았다 한다.

모하메드 베이의 군대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서쪽 벽에 구멍을 뚫으면서 심하게 손상됐다고 전해진다.

 

나는 지금 로마시대에 세운 원형경기장 앞에 서 있다. 이미 쓰러져간 카르타고와 로마의 영광과 멸망이 동시에 교차하는 순간을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뼈대만 남은 원형경기장 앞에서 스산한 바람이 분다.

나도 모르게 푸치니의 <나비부인>에서 야마도리가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폐허가 된 그 자리에서 삶은 계속되고 역사는 폐허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한다. 삶은 여전히 희망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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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17일 제9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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