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닝봉으로 오르는 길
우리가 머문 곳은 유목민들이 소와 양떼를 풀어놓고 키우는 넓은 목초지대로 레닌봉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따라 듬성듬성 유르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7, 8월 푸른 목초를 찾아 이 높은 고지까지 떠돌아다니는 유목민들은 소젖을 짜고, 레닌봉을 오르는 산악인들의 짐을 날라다주는 포터를 하면서 추운 여름을 나고 있었다.
레닌봉 계곡
유르트 뒤의 야트막한 능선엔 1990년 눈사태로 죽은 40명의 산악인을 기리는 위령비가 서 있었다. 레닌봉을 목표로 등반을 시작하는 많은 산악인들이 묘비 앞에서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일행의 안전을 비는 묵념을 하고 지나갔다.
사고는 90년 7월13일 오후 8시30분에 일어났다. 그날 레닌봉 정상을 오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던 6,300미터 캠프2 부근에서 대규모 눈사태가 발생해 수십 명의 산악인을 영원히 묻어버린 것이다.
현지 구조대는 엄청난 양의 눈을 치우고 시신을 거뒀는데 이는 세계 산악사고 사상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사망자는 소련 27명, 체코 6명, 이스라엘 4명, 스위스 2명, 스페인 1명으로 모두 40명이었다.
90년 눈사태로 죽은 산악인 위령비앞에서 넋위로 안전기원
능선 너머너머 절경... 험준한 만큼 천연의 설경에 탄성절로
능선 너머너머 절경... 험준한 만큼 천연의 설경에 탄성절로
설원의 풍광
이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특징 때문에 1800년대 러시아왕국에 복속된 이래 구소련 어느 공화국보다 고산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산이 험준한 만큼 사고도 많은 지역이라 1974년에는 엄청난 폭풍설과 눈사태로 15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내용의 로버트 크레이그의 저서 <파미르, 폭풍과 슬픔>에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당시 공산주의 종주국으로 자처하고 있던 소련은 폐쇄국가였으므로 자연히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고원 일대도 산악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에서였는지 소련은 자신들이 보유한 7천미터급 봉우리 레닌(7,134m)과 코르제네프스카야(7,105m), 코뮤니즘(7,495m)을 개방하면서 첫해에 각국의 유명 산악인을 초대하여 처음으로 파미르 국제캠프를 열었던 것이다.
2차대전 이후 30여 년 만에 개방된 지역인 만큼 전 세계 170여 명이나 되는 등반가들이 파미르고원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리고 눈덮인 정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혹한과 시속 130킬로미터의 폭풍설이었다.
당시 파미르 소련원정에 참가했던 미국인 저자는 그 여름 파미르를 휩쓴 엄청난 재난과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모든 악조건에 정면으로 맞선 클라이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 그리고 그 용기와 인간의 의지를 생생한 체험 속에 잘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참사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매년 200명이 넘는 세계 산악인들이 그곳을 찾아 7천미터급 등반의 꿈을 이루고 있다. 이지역은 1991년 구소련의 붕괴로 키르기스 공화국 산악연맹에 복속되었다가 현재는 키르기스 산악인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가파른 능선 타고 캠프1을 향해
4일간의 고산적응을 마치고 캠프1으로 출발하는 아침이 되었다. 비록 레닌봉 정상을 밟는 산행은 아니지만 4,200미터 고지까지 8시간의 산행이 이어지는 코스이기에 모두들 나름 마음다짐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나를 비롯한 30대 이상인 3명의 각오는 더욱 각별했다. 1박을 하는 데 필요한 텐트와 식량은 포터에게 맡기고 비교적 편한 발걸을으로 나섰다. 1시간가량 이어지는 넓은 초원길에서는 어릴 적 뒷동산 소풍을 가는 어린아이마냥 신나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바뀌는 변화무쌍한 이곳의 날씨도 우리의 기운을 복돋우는 양 더없이 화창했다.
고행의 능선
평지가 끝나자 가파른 능선이 이어졌다. 한국의 산처럼 수목이 우거진 상쾌한 오솔길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눈으로 덮였다 녹기를 반복한 산세는 풀 한 포기 찾을 수 없는 자갈과 진흙길이라 자칫 잘못 발을 디뎠다간 미끄러지기 십상.
정말 그랬다간 45도 이상 되는 경사도를 타고 산 밑까지 굴러 떨어질 판이니 신경은 곤두설 대로 곤두섰다. 게다가 길이랄 것도 따로 없다. 높은 경사면을 타고 바로 가기 어려우니 갈지(之)자 모양으로 말이 먼저 오른 길이 유일하다.
가파른 경사도에 고산이라 산소까지 부족하니 호흡은 금방 턱밑까지 차오른다. 두세 걸음마다 발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다보니 능선 하나 넘는 데 삼십분 이상 걸렸다.
쉬다 가기를 반복하며 능선 서너 개를 넘어가니 또 다른 절경이 펼쳐진다. 지나온 쪽은 푸릇한 갈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천연의 모습이요, 앞으로 갈 길은 눈 덮인 백색의 설경이다. 협곡 사이로 눈이 쌓이고 쌓여 얼음처럼 굳고 그 층이 또 갈라져 만들어진 얼음 협곡, 크레바스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 캠프1으로 가는 빠른 길이긴 하지만, 워낙 사고가 많이 나는 탓에 몇 년 전부터는 능선을 타고 가는 길만 허락하고 크레바스 길은 폐쇄되었다. 얼음나라로 들어선 탓인지 고도는 몇 백 미터 차이도 나지 않는데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고 공기도 많이 차가워졌다.
파미르의 괴물체, 설인
1921년 초모랑마봉을 등반하던 영국의 탐험대가 눈 덮인 설악에서 인간의 발자국과 흡사한 흔적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된 존재 ‘설인雪人’ 혹은 ‘예티Yeti’라고도 불리는 이 괴물은 그뒤로 히말라야산맥 하면 떠 올릴 만큼 이곳에서 자주 목격되곤 했는데, 소련의 학자들은 이 설인을 ‘유인원’의 변형된 일종으로 보았다.
이렇게 인간을 닮은 괴물체를 목격했다는 증언이 세계 곳곳에서 부단히 들려오는 가운데 파미르고원이나 부탄, 시베리아 등지에서도 설인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옛 소련의 한 연구자에 따르면 1958년 8월 파미르고원의 빙하 부근에서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체가 갑자기 나타나 두 발을 벌린 채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잠시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사흘 뒤 일행과 함께 그 계곡을 다시 찾은 그는 또다시 기이한 물체를 목격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설인의 정체를 연구해온 옛 소련의 과학자들은 그들이 직립보행을 하고, 휘파람소리를 내며 때론 웃기도 하지만 언어사용이 불가능하다는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냈다. 또한 이들은 동굴에 사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먹이를 찾으러 다니며 사람처럼 음식을 쪼개어 먹는다는 사실과 험난한 산림지역이나 설원 같은 위험한 지형에서도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아냈다.
끝없는 설원
그러나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설인이 있다고 알려진 대부분의 지역은 설원과 같은 기후변화가 극심한 지역이라 그런 환경에선 어떤 생명체라도 생존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기 때문이다. 설원 위에 남겨진 발자국도 어쩌면 바람이나 기온변화로 인해 실제보다 커보이게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설인의 유해를 발견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 그렇다면 결국 설인은 사람들의 환상이 빚어낸 존재에 불과한 것일까.
나를 더욱 겸손하게 만든 레닌봉
산머리로 해가 넘어가면 금새 어두워지는 탓에 서둘러 캠프1으로 이동했다. 능선을 몇 개나 넘었을까. 레닌봉을 밟기 위해 캠프를 차린 등반가들의 텐트무리가 보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하루를 머물 캠프1에 도착했다.
레닌봉 정상이 바로 바라다보이는 자리, 몇 개의 능선으로 둘러싸인 움푹 파인 분지에 우리가 머물 캠프가 있다. 4,200미터 고지. 고작 400미터 위로 올라왔을 뿐인데 또다시 고산증세가 나타나고, 여태 멀쩡하던 일행들도 고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등반이 고되기도 하고 증상이 심해지기도 해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추위에 어느 정도 단련된 탓인지 밤이 그렇게 괴롭지는 않았다. 동 트는 것이 느껴저 텐트 밖으로 나오니 간밤에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우리가 잤던 텐트도 눈으로 덮여 형체만 겨우 알아볼 정도다.
캠프1이 이 정도인데 레닌봉을 오르는 캠프2, 캠프3은 어느 정도일지 가보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다. 밤새 폭설이 내려 우리가 머문 캠프로 눈사태가 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자연은 자연 스스로 위대하고 절대 가볍게 여겨선 안 될 것이란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하산하기 위해 배낭을 짊어지며 레닌봉을 올려다보고 작별인사를 했다. 비록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 장엄함을 가슴에 담으며 나를 더욱 겸손하게 만든 레닌봉, 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2016년 7월 15일 제78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