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거칠고 눈은 산마루에 수북히 쌓였는데
험한 골짜기에는 도적떼가 들끓는다.
새는 날아가다 깎아지른 산을 보고 놀라고
사람은 좁은 다리를 건너며 어려워한다.
평생 눈물 흘린 일 없었는데
오늘은 천 줄이나 뿌리도다.
험한 골짜기에는 도적떼가 들끓는다.
새는 날아가다 깎아지른 산을 보고 놀라고
사람은 좁은 다리를 건너며 어려워한다.
평생 눈물 흘린 일 없었는데
오늘은 천 줄이나 뿌리도다.
1300여 년 전 신라의 승려 혜초는 약관의 나이에 인도와 중앙아시아, 아랍을 4년간(723~727) 여행하고 돌아와 그 순례행적을 정리한 <왕오천축국전>에서 파미르고원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굽이굽이 끝없이 펼쳐진 길,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으로 그 험난한 길 걸으며 혜초는 시 한 수 읊는다. 평생에 없던 눈물까지 흘리며....
그에 앞서 당나라의 현장법사는 628년 장안(長安:지금의 서안)을 떠나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인도에 갔다가 불경 600여 권을 가지고 645년 귀국했다. 그때의 구도행적을 담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파미르고원에 관해 “옛날에 만 명이 넘는 상인, 수천의 낙타가 캐러밴(隊商)으로 왔으나 눈과 바람에 사람과 낙타가 모두 목숨을 잃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 역시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서 “말을 타고 12일간 이 고원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을 파미르라고 부른다. 12일 동안 마을이나 오두막 한 채도 눈에 띄지 않고, 가도 가도 끝없는 길만 나 있는 사막과 같은 곳이어서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다.그렇기 때문에 그곳을 통과하려는 여행자는 반드시 식량을 가져가야 한다.
높은 고도, 강추위, 그리고 먹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연조건 때문에 그곳에는 새 한 마리도 살지 않는다. 더욱이 강추위 때문에 불이 밝게 타오르지 않고, 화력도 약해져 고기조차 잘 구워지지 않는다”라고 그 고단했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1271년 베네치아를 떠난 마르코 폴로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중국으로 갔다가 25년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편, 1999년부터 4년에 걸쳐 1만2000킬로미터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혼자 도보로 여행한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그의 저서 <나는 걷는다>에서 파미르 도착 부분을 이렇게 쓰고 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풀밭이 짧은 파도를 치며 물결쳤다. 왼쪽으로는 거대한 호수가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고, 그 위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어떤 종인지 알아보기 힘든 새들이 날아다녔다. 하지만 나를 감동시킨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저 아래, 아주 먼 곳에, 거대한 흰 벽 위에 있는 역시나 거대한 검정색 벽에 눈이 빨려 들어갈 듯했다. 막 파미르에 다다른 것이다. 고원은 너무 높고 인상적이면서, 너무 위협적이어서, 구름과 바위와 눈으로 둘러싸인 이 바리케이트를 향해 감히 모험에 나섰던 초기의 여행자들이 공포를 느끼면서 여행을 계속한 것도 이해가 갔다.”
물론 요즘은 자동차 타고 편안히 다닐 수도 있고 용감한 젊은이들은 오토바이나 자전거로 파미르를 넘나드는 세상이 되었지만 아직도 길은 험하고 산마루에는 여전히 엄청난 눈이 쌓여 있다.
식량준비는 필수, 높은고도 강추위 열악한 자연조건 극복필수
도보중 만나는 암흑의 밤, 반짝이는 소금 빛 별 황홀감 도취
도보중 만나는 암흑의 밤, 반짝이는 소금 빛 별 황홀감 도취
이렇게나 긴 밤이 또 있을까.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고소증은 밤새도록 나를 괴롭혔다. 머릿속을 긁어내는 두통과 계속되는 설사. 더 참기 어려운 것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였다.
가져간 옷가지며 침낭이며 몸에 두를 수 있는 것은 모두 꺼내 둘렀지만 뼛속으로 스며드는 한기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침낭 속에 웅크리고 있기만 해도 좋으련만 계속되는 요기尿氣에 수시로 바깥을 들락거려야 하니 그 또한 죽을 맛이었다. 내 평생 그토록 추운 밤은 처음이었다.
쉬이 잠을 못 이루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파미르를 너무 만만하게 봤구나. 전 세계를 돌아다녔어도 이만큼 힘든 곳이 없었는데, 자만했던 내 마음을 파미르가 벌하는구나.
이 상태로는 며칠이 아니라 하룻밤도 못 참겠다. 파미르 구경은커녕 저승구경 먼저 할 수도 있겠구나. 일행에게는 미안하지만 날이 밝으면 도시로 내려가야겠다. 육체적 고통이 정신을 더욱 나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도저히 추위를 털어내지 못해 결국 해가 뜨려면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텐트 밖으로 나섰다. 웅크렸던 몸을 풀기 위해 크게 기지개를 켜는 순간, 파미르가 내게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별들이 내 시야로 쏟아져 들어왔던 것이다.
까만 도화지에 점점이 흰 소금을 흩뿌린 듯 밤하늘은 반짝이는 별들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도시에 살면서 별을 볼 수 있었던 날이 얼마나 될까. 아니, 어디서 이 많은 별들을 한눈에 볼 수 있을까. 고산증으로 괴로워하던 것도 잠시 잊고 동이 틀 때까지 별들의 멜로디에 푹 빠져버렸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마친 후 우리 일행을 인솔하는 박 대장에게 하산의사를 타진했다. 나 말고는 아직 고산증을 겪고 있는 사람은 없는 듯 다들 주변풍경을 구경하며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고산증은 몸이 적응만 하면 되는지라 박 대장은 베이스캠프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해발 3,700미터 정도의 유목민 텐트를 일단 빌리기로 했다. 일행 중 나이가 많은 편이 나와 두 명의 교수님, 그리고 가장 나이가 적은 이 부장이 유르트에서 지내기로 하고 베이스캠프에서 철수했다. 고도가 조금 낮아졌을 뿐인데도 숨 쉬기가 훨씬 편하고 두통도 많이 가라앉았다.
오후가 되자 몸 상태가 현저히 좋아졌다. 반대로 팔팔하던 이 부장과 최 교수님이 쓰러지고 말았다. 고소증은 나이나 체력과 무관하다더니 내가 좋아진 반면 다른 일행이 한 템포 늦게 증세가 나타나고 있었다. 원래는 오늘부터 사나흘 정도 고산적응훈련을 하며 근방을 트레킹할 예정이었으나 지금 상태로는 한 발짝 움직이는 것도 무리였다. 고산증으로 쓰러졌던 일행의 거의 하루밤낮을 꼬박 누워 지낸 뒤에야 제 컨디션을 찾을 수 있었다.
[2016년 6월 24일 제77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