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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위안부소는 일본군부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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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관 아사오 도라오(早尾雄)공문서에서 본 위안부소 1937년7월7일 만주사변에 계기로 일중전쟁이 터졌다. 일중전쟁이야말로 일본이 이긴다면 중국을전초기지로 하여 세계전쟁의 기틀을 잡은 계기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무엇보다 일본국민의 정신교육을 함양하는 야마도 정신(大和精神)을 국시로 삼고 일본국민을 비롯하여 식민지국가의 국민들까지 야마도 정신을 심기위해 모국어 사용금지 창씨개명 내선일합(內鮮一治)을 강조했다.
 
그러나 일선에서 싸우는 군인들은 정신 교육을 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살벌한 전쟁터라 탈영하여 살해 방화 폭행을 일삼고 전쟁을 치르는데 정신무장을 하지 않았다. 치안은 말이 아니었고 군인들의 사기는 떨어 질 때 까지 떨어졌다.
 
전쟁을 치를 수 없을 때 군지휘관이 군인들의 사기를 돕고 치안을 잡기위해 각부대에 위안부소를 1937년 1월12일 상해 야전부대에 군위안부소를 처음 두게 되었다는 문서를 필자가 발견하였다. 이 문서는 소화(昭和)14년(1939년)6월에 군위관 아사오 도라오(早尾雄)대위가작성한 문서이다. 아사오는 카네자와대학(金澤大學)의학부를 졸업하고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상해 제일병첨부대 군위관으로 근무하면서 당시 일본군인들의 동향을 연구하는 전쟁심리연구소에서도 일을 했다.
 
그가 쓴 문서에는 “전장에 있어서 특수현상과 그 대책”이라 글이 있다. 글내용을 보면 “전장에 나아가는 병사들이 성욕을 오랫동안 억제하면 자발적으로 중국부인들께 성폭행을 하게된다. 성폭력을 하면은 황군(皇軍)의 이미지를 추락하게되니 황군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였고 군인들의 사기를 돕기 위해 위안부소를 차려 놓았으나 성폭행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아사오 군위관이 말하는 바와 같이 위안부소는 황군의 위신과 군인들의 사기를 돕기위해 군부가 세운 것이라는 명백한 문서이다. 필자가 이문서를 발견하고 문서를 취급한 기관을 조사한 적이 있다. 위안부소가 있었고 일본군부가 전쟁시 조선인을 비롯해 동남아 여성들을 연행하여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짐에 1991년도 일본은 전쟁 시 군부대 위안부소를 설치하여 조선여성들을 연행해서 성폭행을 했는지 사실을 조사하라는 연구프로젝트를 민간업자들에게 주었다.
 
민간 업자들 중에서도 우익성이 있는 자들을 뽑아 “재단법인 ”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위안부 관계자료위원회“를 조직했다. 위원에서는 1991년 12월부터 1992년 6월까지 위안부에 관한 사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6개월간 조사하여 결과물을 “종군위안부관계자료집성” 1권부터 5권을 대월서점(大月書店)에서 출간했다. 조사한 사료관은 정부문서보관소 국회도서관 방위청 사료관각대학 문서사료관을 중심으로 조사한것이다. 260여권의 원본서류를 비롯해 사진 등 많은 양이 담긴 조사 보고서였다.
 
조사보고서 제2권 59페이지부터75페이지에 줄친부분을 보면 위안부소는 황군의 권위와 군인들의 사기를 돕기위해 위안부소를 군부가 만들었다고 기록하고있다.
 
 
1937년 상해 제일병첨부대 군위안부소 1호

군위관 아사오도라오 직접 작성문서 발견
 
 
 
일본마이니치(每日新聞)에서 발간한 “1억인의 소화사-불허가사진사-
 
1977년12월1일 발간한 사진첩이다. 이 사진첩을 발간한 이유를 몇 가지 들어 설명 해놓았다. 이유는 전쟁시 종군 기자들이 전장에서 찍은 사진을 몰래 숨겨 들어와서 해방이 되어도 사진을 공개할 수가 없었고 그동안 숨겨온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일본군부가 저지른 사실을 내놓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사진 한 장 한 장마다 불허가사진이라 도장이 찍혀있다.
 
공개 못하도록 되어 있으나 마이니치신문이 허락해서 사진판이 나왔다고 한다. 62페이지에서 63페이지를 보면“일본육군이 개설한 위안소”란 제목이 있다“ 위안부소를 설명하기를 1938년1월13일 상해 양가택(楊家宅)에 병첨부대가 최초로 위안소를 지었다. 위안소로서는 제1호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성전대권의 용사대환영”(聖戰大捲의勇士大歡迎)이란 정문에 간판이 붙여저 있다. “거룩한 전쟁의 대세를 가진 용사들을 환영”한다는 의미이다.
 
러일전쟁으로 부터 일본은 전쟁을 치는것은 하나님이 주신 전쟁이고 전쟁에 나아가는 자는 성인이라했다. 한일합병과 식민지통치는 하나님이 주신선물이라 했다. 이런 생각은 일본군부만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범종교인들도 주장하고 헌금을 거두워 일선에 보내기도 했다. 한일강제합병당시 우리나라 지식인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졸저:근대일본기독교와조선 참조)
 
사진에서 보는 바와같이 왼쪽 간판에는 신심봉 대화무자의서비스(身心棒大和撫子)라 쓰여져 있다. 일본말로 번역하자면은 몸과 마음을 함께 바치는 일본의 마이코의 서비스란 뜻 이다. 마이코는 당시 일본군인들이 붙인 조선기생이란 말이다. 당시 군인들이 조선마이코가있기때문에 전쟁을 해도 즐겁다 했고 죽어도 마이코 마이코하면서 사격을 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불허가 사진집 위안부설명에 이런말이 있다.“세계전쟁사 가운데 일본군인들이 위안부들을 끌고 왔는것은 일본군부도 부끄러운 일이었다”하고 특히 “조선여인들이 미인이였고 주로 16세 소녀들, 순수한 여성이고 남자 경험이 없는 자들이다. 조선마이코(조선여인들의명칭)는 대인기였다” “상해 일본군부대가 여려곳에 있었다. 위안부여성만8만인이 있었다. 일본군인 40명당 위안부 한사람씩 조직되어 있었다.”고 했다.
 
40명당 위안부한사람이 조직되여있으니 성병이 너무 심했다고 당시 군위관인아사오 테즈오(麻生徹男)소위는 “화류병(花柳病)의 적극적 예방법”지침을 발표하고 위안부소 갈때는 반드시 “샥쿠”(콘돔)을 가지고 출입하도록 위안부소 입구에 주의 간판에 쓰여있었다. 콘돔을 가지고 오지않은 자는 출입을 시키지 않았다.
 
아래 사진에 있는 바와같이 일본군인들이 사용한 콘돔의 명칭은 “돌격일번(突擊一番)”이라했다. 당시 군인들은 “돌격일번은 의무적으로 배급받았기 때문에 누구라도 가지고 있었다. 군위관 아사오테쯔오는 ”군사훈련시 또는 사격연습시 “돌격일번 구호를 붙이고 사격을 실시했다고 한다. 당시 군용 건빵 한봉지에 “돌격일번”이 반드시 들어 있어서 전쟁시 군수물품을 생산하는 회사중 “돌격일번”을 만드는 회사가 가장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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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②일본군 위안부소 설치에 관한 문서 ③군인들이 사용한 콘돔,‘ 돌격일번’이라는 명칭의 이 콘돔은 당시 군인들이 다 가지고 있었다 ④마이니치가 발간한 사진첩에‘ 공개불허가’한다는 붉은 도장을 찍은 것 ⑤병첨부대가 최초로 설립한 위안소. 거룩한 전쟁의 대세를 가진 용사들을 환영한다는 간판문구가 적혀있다.
 
 
/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전 부산외국어대 교수
 
[2015724일 제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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