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광복 73주년을 맞아 의미있는 문서가 또 발견됐다. 왜곡과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 일정부에 쐐기를 박을 만큼 분명하고도 확실한 문서라서 관심이 모아진다. 일왕의 긴급 대해령과 사령관의 출항금지 급전에도 불구 출항을 단행하여 침몰됐던 우키시마마루호는 자폭에 의한
폭침임을 증명해주는 문서다.
1945년 8월 15일로 일본이 패전한 후 미연합군 맥아더 장군은 패전한 일왕에게 ‘동남아에서 모든 군인은 행동을 금하고 무기도 움직이지 마라’라는 지시를 했다. 통보를 받은 일왕은 대해령(일왕의명령) 52호를 내려 군사 행동을 금하고 항공 선박은 8월 24일 오후6시 이후로는 출항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730톤 대형함대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조선인(강제징용자)을 태우고 1945년 8월 2일 오후10시 아오모리(靑森) 오미나도(大港)에서 출항했다. 부산으로 항해해야 할 우키시마마루는 위험한 기뢰가 깔려있는 마이주루(舞鶴)연안으로 들어가 8월 24일 오후 5시20분에 폭침되었다.
일본정부는 마이주루연안에서 미연합군이 깔아놓은 기뢰에 폭침되었다고 하고, 피치 못할 사건이라 간주하며, 재판에서도 패소시켰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일왕이 내린 대해령은 우키시마 마루선장이 출항전 7시 35분에 받았다.
우키시마마루 선장 도리우미(鳥海金吾)가 분명히 대해령 52호를 받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문서가 이번에 또 발견되어 이를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이 대해령 문서는 일종의 전보(電報)다. 전보 중에도 급전보(急電報)이다. 전보는 삽시간에 본인이 받아보는 문서로 전보에도 ‘급전’이라고 적혀있다.
이 급전은 대해령 52호, 53호가 내려지고 급히 전보를 보낸 것이다. 우키시마마루 배가 떠나려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해군참모가 급히 보낸 것이 대해지(大海指)이다. 대해령은 일왕이 보낸 것이고, 대해지령은 최상급 지휘관이 보낸 것이다.
대해지령 533호를 급전으로 보냈는데 ‘급전221349번’이라 기록되어 있다. 보낸 시간은 1945년 8월 22일 오후 1시 49분이었다. 일왕이 대해령을 내린 5시간 전이다. 직속 상관이 보낸 급전이라 충분한 시간에 받은 전보이다. 전시에 지휘소에서 보내는 것은 신속정확하다.
이런 급전도 있는데 일당국은 아직도 우키시마마루 배는 피치 못한 사고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 사건은 자폭행위이다. 왜냐하면 패전 후 일본 군인들은 자결운동을 일으켰다. 자결운동이란 스스로 일왕께 목숨을 바치는 자살행위이다. 죽어서 야스쿠니신사에 봉양받기 위한 야마도(大和精神) 정신(천황에게 바치는 정신)의 발동이라 볼수있다.
그도그럴것이 일본에서는 패전 후 자결운동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오끼나와에서 시작해서 동남아에서도 거세게 일어났다. 충성하는 일본군들의 자폭행위이다. 자결 운동속에 조선인 강제 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들 등 수 만 여 명이 죽기 싫은 죽음을 당한 것이다.
우키시마 배에 탄 기관병들도 자폭 운동속에 강제징용자들을 태우러 온 우키시마마루 배도 조선인을 죽인 계획적인 것이라 판단된다. 이번에 발견된 출항금지령 대해지를 볼 때에 조선인을 죽이기 위해 계획된 살인극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정부는 대해령 52호를 못 받고 출항했다고 주장하는데, 5시간 전에 받은 대행지 전보도 못받았는가 일본정부에 묻고 싶다. 또한 우키시마마루 선장은 일등 항해 사이고, 군 출신 장교다. 수년간 전쟁 무기, 전쟁 물자를 싣고 다닌 항해사이다.
기뢰가 어디 묻혀있는지를 잘 아는 베테랑이다. ‘왜 기뢰 밭으로 들어간 것인가’하는 것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정황을 비추어볼 때 우키시마마루 폭침은 일부로 계획된 자살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2018년 8월 24일 제103호 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