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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경주 석굴암 석실입구 일본이 개조했다”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일본 도쿄대서 석굴암 수리보고서 발견
 
 
 
일제강점기 신사 도리이(鳥居)로 개조
  
 
경주 석굴암이 일본식 신사와 같은 구조로 입구가 개조된 사실이 밝혀졌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국보 제 24호로 지정돼 있는 경주 석굴암의 석실 입구가 일본 신사(神社)와 같은 “도리이(鳥居)” 모양으로 개조되었다는 것.
 
이같은 사실은 한국한일문화연구소 김문길 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이 최근 학술 연구차 일본을 방문시, 교토대(京都大) 도서관에서 “석굴암 수리 공사보고서”를 발견함으로써 밝혀졌다.
 
사료에 따르면 당시 일제는 신도(神道) 사상으로 조선시대 불교신앙을 탄압해 왔으나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이 방치된 것을 보고 당시 데라우찌(寺內) 일본 총독이 석굴암의 불상 등을 일본으로 방출해 갈 것을 지시한 사실도 기록돼 있다.
 
그러나 주위에서 수리를 한 후 당분간 보관했다가 완전한 상태에서 방출하자는 의 견들이 나오자 수리공사를 하도록 했다. 또 데라우찌 총독은 수리공사를 하는 기간 중 직접 불국사까지 내려와서 지휘를 했으며 석실입구에 돌기둥은 일본 신사 입구와 같이 神門를 “도리이” 모양으로 만들도록 지시까지 한 사실도 밝혀졌다.
 
김문길 소장은 “일본 신사의 신문(神門)은 대륙에서 들어간 '우지가미(氏神)'인데 일본적인 신사가 세워질 때마다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신사의 “도리이(鳥居)”는 神明鳥居, 唐破風鳥居, 春日鳥居, 明神鳥居, 丸木鳥居,黑木鳥居 등의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나 석굴암 입구에 개조한 “도리이”는 “가라하후(唐破風鳥)”형으로 대륙의 바람을 막자는 의미를 뜻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
 
석실입구 돌기둥에 일본의 신사입구와 같이 신문(神門)을 “도리이(鳥居)” 모양으로 개조한 것은 우리 한민족의 얼을 꺾는다는 의미이고 일본신사의 정기를 접목시키기 위한 방편이라고 소개한다.
 
김문길 소장에 따르면 “석굴암의 원래 명칭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처럼 1910년까지 석굴사(石屈寺)라고 사용되어 왔으나 일제가 석굴암을 수리할 때 수리청원서와 “석굴암 수리 공사보고서(15페이지)”에서 석굴암으로 (1913년) 명칭을 처음 사용 한 것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뿐만아니라 석굴암은 엄연히 '석굴사石屈寺'였는데 암자로 낮추어 사용한 것도 우리 불교정신을 무너뜨리게 하는 이유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김문길 소장은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일제가 개조한 석실입구의 돌기둥은 제 모습을 찾아야 하고 잃어버린 石屈寺의 명칭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 “우리나라의 불교는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으로 탄압을 받았고 일제시대에는 신도(神道)사상에 밀려 사찰이 신사로 바뀌는 등 이중으로 탄압을 받은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고 조명했다.
 
 
송나영 기자
[2011년 5월 16일 19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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