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10월 18일

사회

월북피해 통영의 딸 신숙자 모녀 구출서명운동 확산

 
희대의 북한 문화공작원 ‘윤이상’ 재평가 여론도 확산
 

작곡가이자 음악인 윤이상, 그는 과연 한국을 빛낸 걸출한 작곡가일까. 뒤늦게 시민사회에 그의 종북활동이 속속들이 알려지면서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지난 1995년 사망 이후에도 지자체는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인으로 존경을 받아온 그에 대해 한국민으로서 재평가가 내려져야한다는 여론마저 들끓고 있다.
 
국경을초월하는 게 예술이라고 하지만, 동포를 사지에 빠뜨리고 국가에 반하는 활동을 해온 인사를 지역사회가 떠받들고 추모하며 인물을 문화상품으로 키워가는 게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것이다.
 
윤이상 이념론과 종북활동이 본격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올 4월 동아대에 이어 지난 5월 25일~6월 19일 통영시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 도서관에서 열린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를 통해서다.
 
납북 유인됐다가 탈출한 오길남 박사에게 윤이상이 월북을 종용하며 건넸던 가족의 육성 카세트테이프와 사진등이 전시돼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독일 등 유럽 유학생 입북공작원이자 종북단체의 핵심간부로 활동해온 윤이상은 김일성 사체보관소인 금수산기념궁전 방명록에 충성의 맹세를 남겼는가 하면 김일성 생일 찬양노래를 작곡해 바쳤고 북한을 조국이라 칭하고, 부인 이수자씨와 함께 말년에 파리 독일등지에서 병환 중에도 절절한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찬양을 아끼지 않은 희대의 북한 문화공작원으로 암약한 사실이 드러났다.
 
윤이상은 민주사회건설협의회 회장, 한민족민주통일 해외한국인연합 구주본부의장, 한국학술연구원 원장, 유럽민협 고문을 비롯 독일 베를린에 설립된 이적단체 '범민련'의 공동의장을 맡아 반한활동을 적극 전개해왔다.
 
윤이상의 종북활동은 지난 1963년 독일에 거주하던 시절 북한에 포섭돼, 문화공작원으로 활용해왔으니 사망전까지 명백한 반한활동이 무려 30여년이다. 북한체제에 대한 흠모와 휴전 대치국가의 통치자에 대한 찬양을 떠나 그의 양심과 인간성이 질타를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멀쩡한 가족을 유인하여 북한체제의 도구로 활용되는데 앞장섰으며 그로인해 한가족이 파멸, 생이별하고 고통을 받아온 안타까운 사실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대표적인 사람이 윤이상에 의해 북한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탈출한 오길남(69)의 처 신숙자(69. 통영여중9회 졸업생)씨와 입북당시 11살 9살이던 두 딸 혜원·규원양이다.
 
신숙자 모녀는 남편 오길남 박사의 탈출이후 1987년 북한의 수용소 가운데 강간 폭행 등 가장 열악하고 혹독하다는 정치범 수용소(요덕수용소)에 갇혀 지금은 생사를 알 길이 없다.
 
오길남 신숙자 부부와 가족이 북한으로 가게 된 배경은 간단하다. 오길남박사는 당시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아내 신숙자씨는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1985년 겨울 북한의 요원으로부터 북한에서 좋은 교수직과 아픈 아내에게 최상의 진료를 보장하겠다는 말을 듣고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월북하게 된다. 그러나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오씨의 가족은 외부와 차단된 채, 세뇌교육을 받았고 1년 후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는 남한 부부를 데려오라는 지령을 받고 독일로 가던 중 탈출했다.
 
아내 신숙자씨와 논의가 된 사안이다. 오박사가 북한을 떠나기 전 아내 신숙자씨는 "탈출에 성공하면 석 달안에 빼내달라. 그렇지 않을 때 우리 모두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으라"며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를 받을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러운 범죄공모자의 딸들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또 다른 희생자들을 만들지 말고 당신 하나만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다면 우리 몫을 살아 달라. 나는 애들에게 아버지는 바보스러웠지만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말하겠다.
 
그 범죄 공모에 절대 가담하지말라. 도망쳐라"고 말했다. 이후 혼자 탈출한 오길남 박사는'요덕수용소의 어둠속으로 잠겨버린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이라는 책(도서출판 세이지. 20116월 초판발간)을 통해 북한사회를 고발하고 순간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 가족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온 눈물겨운 노력들을 담아 윤이상으로부터 종용당해온 충격적인 사실을 생생히 고발하고있다.
 
지금까지 신숙자 모녀의 안타까운 삶과 '북한정치범수용소 사진전'을 관람한 시민들은 한결같이 분개했다.
 
"나와는 관계없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통영의 사람이 그곳에 갇혀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그렇게 존경했던 윤이상이 북한공작원이었다니 가히 실망스럽다" 는 한 주부는 "통영시 차원에서도 예술가로서 한 개인의 예술성은 높이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국익에 해를 끼치는 반국가적 활동에 대한 구분과 징벌은 명확히 해야 할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통영 출신 재부 인사도 "윤이상 개인의 음악활동과 예술성은 높이 평가할 만하나 이번에 알려진 사실대로라면 지방정부가 더 이상 지역대표 문화상품으로 내세우는 것은 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몇 해째 개최해온 관련 행사가 흐지부지해지는 것과 관광객의 감소 등 지자체 차원에서는 여러가지 문제가 따르겠지만, 반드시 수정이 필요한 주요사안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윤이상의 월북 공작활동과 북한통치자에 대한 찬양 등으로 북한은 '윤이상 음악당' 건립과 매년 10월 '윤이상 음악회'를 열어 그의 미망인과 딸을 초청하고 있다. 지금도 윤이상의 처 이수자 모녀는 북한과 독일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북한사회의 최고 VIP로 외교관 대접을 받으며 호화롭게 살고 있다고.
 
그에 비해 피해자 가족인 신숙자 모녀는 열악한 수용소 환경에서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으니 가족의 비애감이 클 터. 현재 윤이상에 대한 재평가와 신숙자 모녀 생사확인 및 구출탄원서 서명운동은 지난 6월로 1만 여 건을 넘었고 현재에도 통영지역사회를 넘어 창원 등 경남일원과 부산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인구 14만의 작은 도시 통영은 걸출한 문화예술인을 대거 배출한 예향의 도시다. 그동안 통영을 대표하는 행사 및 축제가운데에도 예술인의 이름을 내건 문화브랜드도 통영을 알리는데 일조해왔다.
 
그 대표적인 행사가 지난 2003년 창설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와 윤이상 기념사업을 주제로 한 도천테마공원. 경상남도, 통영시, 창원MBC가 주최하고 (재)통영국제음악제가 주관하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첼로, 피아노, 바이올린 등 3개 부문을 대상으로 매년 돌아가면서 한 부문씩 개최되고 있고 올가을엔 바이올린 부문 경연이 열린다.

2006년 국내 콩쿠르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산하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WFIMC)에 가입하여 그 공신성을 인정받았고 지금까지 8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국제콩쿠르로의 면모를 공고히 하고 있다니 '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의 명칭변경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문화예술가로서의 평가와 이데올로기 문제는 따로 봐야한다는 시각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 다만 지금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신숙자모녀 생사확인 및 구출탄원 서명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윤이상의 충격적인 종북활동과 반한활동이 낱낱이 알려질 경우 언제까지 국민들이 관대할 지는 장담할 수없다.
 
최근 통영의 딸, 신숙자 모녀 구출서명운동 및 북한인권 바로알기 전시는 서호동 통영여객선터미널 대합실에서 열렸다. 현재 1만7천여서명을 돌파하고 있으며 전시회는 통영일원에서 상시 열린다. 자세한 전시문의는 통영 현대교회(담임목사 방수열)로 문의하면 된다.
 
 
유순희 기자
[2011년 8월 18일 22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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