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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부산 곳곳에 스며든 소월의 시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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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넘어서서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국민시인 김소월(본명 김정식, 1902~1934), 한국인치고 소월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해방되자마자 1946년부터 교과서에 시가 실리기 시작하였고, 수능 등 각종 시험에도 단골로 소월시가 나온다.

국민 애송시 조사를 언론기관 같은데서 해보면 시 진달래꽃이 항상 1위다. 오죽했으면 외국인 이주민들의 한국 귀화시험에서도 한국인이 가장 애송하는 시 진달래꽃을 지은 시인은 누구인가?”하고 물을까. 소월은 그런 시인이다.

한국 근대문학의 시작점이고, 우리의 그리움이고 설움이다. 그런 소중한 김소월을 우리는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전국에 123개의 크고 작은 문학관이 있지만 소월 전용 문학관은 한 군데도 없다. 이게 말이 되는가! 국민 대표 시인을 이렇게 홀대하는 나라는 내가 알기론 지구상에 없다.

그래서 그같은 국민시인 김소월의 삶과 문학을 기리고 김소월의 시정신을 유라시아 대륙을 비롯한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기 위한 국제소월협회가 지난해 1226일 부산역의 유라시아 플랫폼에서 출범하였다. 이어 부산시의회 정태숙 의원(부산남구 갑, 교육위원)의 노력으로 황령산 둘레길에 부산시가 문학 생태구역을 설정하고 여기에 진달래 길을 대대적으로 조성하는 방안이 시 차원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렇다면 부산시와 우리 부산시민에게 소월은 어떤 의미일까. 우선, 소월 시인과 부산과의 개인적인 인연은 이러하다. 소월은 22세 때인 1923년에 일본 동경상과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고 관동대지진 탓에 그 이듬해에 유학길에서 돌아오면서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내렸다. 당시는 교통사정도 나쁘고 대한해협을 건너 다니려면 꽤나 숱한 서류가 필요해서, 그는 아마도 오랫동안 부산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넋을 읊은 어느 제목없는 시에서 소월은 바람에게 묻는 형식으로 부산을 언급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난히 바다를 사랑하여 10 여편에 이르는 많은 바다시를 남겼다.

바다‘, ’나의 집‘, ’우리 집‘, ’집생각‘, ’오는 봄‘, ‘漁人(어부)’, ’고향‘, ’고독‘ ’여수‘(旅愁), ’산위에등이 그것이다. 부산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어느 여관에서 시인은 언젠가 제물포 앞바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님생각 집생각,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알 수 없는 운명 생각에 잠못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월은 지역연고를 뛰어넘는다.

우리는 우리의 대표시인 김소월을 좁은 지역연고주의닫힌 민족주의의 틀에 가둘 순 없다. 세계 10위권의 경제권에 진입했고 한류문화가 세계를 휩쓰는 21세기 아닌가. 이 시점에서는 소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우리 사회 전반에 필요하다. 해운, 관광, 물류, 의료관광 등을 넘어 국제적인 문화도시를 지향하는 부산시에도 새로운 문화상징이 필요하다.

그는 이미 민족시인의 면모를 넘어 자신의 맑은 서정과 깊은 시사상으로 괴테, 푸쉬킨, 포우, 네루다 등에 결코 뒤지지않는 세계시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나는 자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열차와 유라시아 횡단열차가 떠날 부산, 2030 부산엑스포 등 세계적인 컨벤션 행사가 줄을 이을 부산하고 소월시인은 궁합이 척척 맞는다고 본다.

만약 다른 도시에서 소월을 탐낸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그는 하나의 틀에 갇히기엔 너무 큰 시인이다. 다른 도시는 자신들의 색깔이나 지향점에 맞는 소월의 다른 면모를 찾아 진달래길을 조성하거나 자신만의 소월문학관을 건립하면 될 일이다. 국제도시 부산에서 부산의 여성계를 오랫동안 대변하고 있는 부산여성신문은 국제시인으로서의 소월의 새 위상에 주목하며 국제소월협회 창립에 동참하였고, 이번에는 소월사랑동호회 회원들과 같이 부산에 남아있는 소월 시의 흔적을 발로뛰며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는 먼저 서면 로타리로 향했다. 지하철 서면 역근처의 영광도서 앞쪽 도로에 소월시비가 있다고 알려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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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우리가 간 날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는 영광도서 출입구 쪽의 도로변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작정하고 눈여겨봐서 그렇지, 평소 때 같으면 모르고 지나쳤으리라. 그런데 또다른 시비인 진달래꽃은 아무리 찾아도 없다. 할수없이 서점 안으로 들어가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책임자같은 분에게 물었더니, “글쎄요, 신경을 안쓰고 예사로 다녀서 그런지 못봤는데요한다.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누르고 도로를 따라 아래위로 여기저기 다녀보았다. 그랬더니 길 건너편 오른쪽 한참 위의 영광도서 신축 주차건물 앞쪽에, 다른 시들과 함께 진달래꽃이 숨어있었다.

진달래꽃엄마야 누나야처럼 비에 젖어 울고 있었다. 길지도 않는 시인데 시를 새길 요량이면 다 새길 것이지, 팔다리를 잘라버려서 그런가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길에...” 거기까지만 시가 새겨져있다.

누가 무슨 연유로 이 시비를 세웠는지도 아무런 기록이 돌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서운한 맘을 누르고 발길을 돌려 해운대구 우동으로,센텀 협성르네상스 아파트로 가보기로 했다. 거기에 존재론과 생명순환을 다룬 그 유명한 철학시 산유화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4월호에 계속)

이재혁(국제소월협회 회장, 사단법인 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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