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군 생가복원 기념사업추진, “반 역사적” 중단촉구
기장군 생가복원 기념사업추진, "반 역사적" 중단촉구
정신대 지원독려, 황도사상 신사참배 주장 친일 활동
“정신대 지원을 독려하며 경성가정 의숙이라는 여학교를 설립하여 친일행보를 일삼았던 민족의 반역자를 미화하고 지자체가 앞장서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반역사적 사업행보로 당장 멈추어야 합니다.”
기장군청(군수 오규석)이 친일여성 고 박순천 여사의 생가를 복원하는 등 기념사업을 추진키로 하자, 부산지역 여성단체가 반발하고 나섰다.
지난 2일 오전 10시 부산여성단체연합(대표 유영란)을 비롯 부산여성상담소 및 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부산여성연대회의, 부산민중연대 등 부산지역 여성·시민단체는 기장 군청 앞에서 ‘박순천 생가 복원 및 기념관 건립 반대’의 입장을 밝히는기자회견을 열고 관련사업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부산지역 여성시민단체는 “최근 통영 경찰서에서 경찰서내 세워진 김덕보 공덕비가 친일행적이라는 논란이 제기되면서 자진 철거되었는가 하면 국내 전국의 지자체에서 관광자원화란 이름과 각종 명목으로 기념사업을 추진하다가 친일행적이 드러날 경우 관련 사업을 모두 취소하거나 사업자체를 변경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시대역행하는 기장군의 역사인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날 여성단체는 “박순천 여사는 일본군의 전쟁협력을 목적으로 조직된 친일단체이며 군수자재 헌납 운동을 전개했던 황도학회의 발기인으로 황도사상과 정신보급운동등 신사참배를 주장하는 강연회 활동에 앞장서온 대표적 친일 인물인데, 민족적 정기를 지닌 여성지도자로 내세우고자 하는 기장군의 몰역사적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기장군이 지난 9월 기장군의회에서 “기장군측이 친일여성으로 지목된 박순천의 생가복원 및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공청회나 시민여론수렴 절차과정을 요구한 구의원의 발언에 대해 재고의 가치가 없다고 묵살”한 처사나 “의회에 승인된 사항이라 재고의 가치가 없다”는 인식은 기초단체장의 역사의식을 의심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함께 기장군의회 김 모의원이 ‘근로정신대 여성은 월급도 받았고, 당시 시대적 상황에 어쩔 수 없었다’는 괴변은 졸렬한 역사인식의 극치라며 “위안부 위해할머니들을 두 번 죽이는 망언에 대해 즉각 사죄해야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여성단체는 올해는 일제강점 100년을 맞아 온 국민이 일본정부차원의 공식적이고 전향적인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의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기장군의 태도는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여성단체는 정신대를 미화한 기장군 구의원에 대한 사과와 기장군의회의 박순천 생가복원사업 적극 저지활동 촉구 등 기장군이 친일여성 박순천 생가복원과 기념사업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 박순천 기념사업 논란 >
친일행적 뚜렷 “사업중단해야”
여성계, 친일 논란인물 5억예산 갈등만 부추켜
기장군, ‘공·과’ 국민에게 알릴권리…추진의지 관철
올해는 일제강점 100년이 되는 해. 아직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시점에서 기장군 (군수 오규석)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게 친일 행적이 뚜렷한 박순천여사의 생가 복원 및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려는 것은 반역사행보라며 여성계가 반발하고 있다.
부산지역 여성단체와 시민사회단체들은 여성정치인으로서의 행적은 그 당시 여성인물로서는 드물게 앞선 행보를 해온 인물이긴 하지만, 그의 이면에 드러난 친일행적을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친일 인물에 대한 논란이 꾸준히 제기돼왔고, 그 행적이 뚜렷한 만큼 관련 사업 추진과 관련 공청회 등 시민여론수렴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2일 기장군청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여성및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현장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관련 항의서한을 기장군의장과 군수에게 전달키로 했으나 오규석 기장군수에게 직접 성명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지역여성계와 기장군측의 팽팽한 주장으로 한동안 복도에서 날선 공방이 이어지기도 했다.
자칫 서한 전달이 불발에 그칠 우려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기장군수실 방문을 허락?받기도. 부산성폭력상담소의 이재희 소장은 “친일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기념관을 건립하려는 이유가 궁금하다”며 “사적인 이익개입조차 의심스럽게 한다”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폐지하여야 마땅한 게 아니냐”며 반대 주장을 제기하자, 오규석 기장군수는 “우리지역의 인물을 널리 알리는 것이 민선군수로서의 할 일”이라며, 논란의 여지에 대해서는 “반대의 여론도 찬성의 여론도 있었지만 결국 판단은 국민의 몫”이라며 기념사업 추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또한 오군수는 “그분(박순천)의 공(功)·과(過)를 우리 국민에게 알릴 수 있는 그런 기회와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니 사려 깊게 이해하고 지켜봐 달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여성계는 “약자인 정신대할머니들을 더 이상 상처주지 말고, 그들을 보듬고 아픈 역사를 보듬는 사업으로 전환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공·과의 알림은 책으로 가능하다”며 “굳이 논란거리를 5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추진하고자는 하는것은 갈등만 부추길 뿐”이라며 반박했다.
오규석 기장군수 또한 초선 때 기장군의 마지막 정신대할머니가 있어 보듬은 사연을 이야기하며, “국민에게 비판받을 부분이 있다면 비판받고 책임질 부분또한 책임지겠다”며, 공청회를 열자는 여성계의 의견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여 기장군의회의 여론수렴과정을 거쳤다”며 기념사업추진의지를 굽히지않았다.
이날 참여한 부산지역 여성계는 “일본제국주의가 우리민족에게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에 대해 일본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 등 어떠한 조치도 이루어지 않았기에 기장군의 태도가 더욱 분노스러울 따름”이라며, “기장군의회도 적극적인 저지노력과 기장군의 기념사업중단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 박순천, 그녀는 어떤 인물?
5선 국회의원 초기 농촌계몽·여권운동…친일행적 ‘오점’
박순천(1898~1983)은 제2,4,5,6,7대 5선 국회의원이자 농촌계몽, 여성인권운동을 활발히 펼친 한국정치사의 최고의 여걸로 알려져 왔다. 정계은퇴후에도 교육자로도 명망이 높았던 박순천은 1989년 경남 동래의 기장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명련이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이갑성과 연대하여 마산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혀 일주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이때부터 박순천은 일본경찰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하게 되었고, 도피생활 중에는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순천댁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이 세인들의 입에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일본유학중 다시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어 마산감옥에서 1년 6개월간 복역, 출감 후 다시 떠난 일본유학에서 결혼했다. 학업을 마친 후 귀국하여 남편과 함께 야학을 일으키고 농촌계몽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창씨개명 강요와 전국에 신사를 짓기 시작할 무렵 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 것이 1936년이다.
일제에 저항하려는 민족적 성향을 간직하던 그녀도 계속된 일제치하의 현실에 타협한 것일까, 1940년 경성가정의숙이 설립되면서 부교장으로 있을 때부터 친일행적이 남겨져 있다.
앞서 여성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황도학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황도사상의 학습, 황도 정신의 보급, 신사참배의 실천과 장려 등을 실천방책을 내세우는 항도강습회에 참가한 활동실적도 역사적 개인적 오욕으로 남겨져 있다.
앞서 여성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황도학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황도사상의 학습, 황도 정신의 보급, 신사참배의 실천과 장려 등을 실천방책을 내세우는 항도강습회에 참가한 활동실적도 역사적 개인적 오욕으로 남겨져 있다.
1941년 12월부터는 조선 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에 연사로 출강하여 군수자재 헌납 운동을 전개, 부녀층을 광범위하게 동원하여 군복수리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던 시점에서 전쟁협력이 목적이었던 단체를 도운셈이다.
1943년 학교마다 두 명을 정신대로 보내지 않으면 학교를 폐쇄시키겠다는 일제의 명령에 따라 경성의숙도 지원자를 받고자했다. 그러나 자원자가 나오지 않자 황신덕교장이 전교생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박순천 부교장도 비슷한 말로 호소하여 결국 교장실 문을 두드리게 된 학생이 김금진 할머니였다.
당시 18세의 나이로 교장과 부교장의 말만 믿고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 지원한 김금진 할머니는 총알을 만드는 후지코시의 군수공장에서 일하다 해방되어 귀국했다. 김할머니의 한 맺힌 사연을 증언으로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청기사’로 다시 한번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경성의숙에서 정신대로 학생을 보내게 된 경위는 1970년 발행된 중앙여고 30년사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일제하 정신대 진상규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드러나게 된 이 사실은 저명한 여성운동의 지도자요, 여성교육자이며 탁월한 정치지도자였던 박순천의 또 다른 과거다.
한편, 위안부가 아닌 월급을 받는 근로정신대였다는 점과 김할머니의 자발적인 지원이었다는 이유로 시대적 책임을 박순천에게 묻는 것은 부당하는 옹호주장과, 교육자로서 박순천은 어린나이의 여학생이 진정 자발적으로 간다하여도 잡아야 하거늘 오히려 부추겼다는 부정적인 주장과 정신대를 겪은 할머니들의 지난한 삶의 고통에 대한 책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세간의 평가도 엇갈리고 있다.
해방 후부터는 건국부녀동맹 부위원장 선출 이후 각종 여성단체 활동에 앞장섰으며, 독립촉성애국부인회 결성, 부회장에 선출, 대한부인회 회장으로도 6년간 재직하였다. 1950년 대한 부인회소속으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1971년 정계를 은퇴하기까지 5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0년대 민주당 총재, 1960년대 민중당 대표최고의원, 신민당고문 등 야당의 지도자를 역임하고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혁혁한 업적을 남긴 것 또한 사실이나, 명백한 친일행적 또한 간과할 수 없다는 지역여성계의 발언처럼 격동의 역사를 거쳐 온 그녀는 칭찬과 비판이 엇갈리는 인물이다.
우리의 역사가 남긴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갈등은 앞으로도 지속될 듯하다.
유정은 기자
[2010년 12월 16일 14호 1면,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