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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치열했던 임란의 역사 되살아나다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 개관
 
조선전기 읍성의 성곽과 건물배치복원전시
동래읍성 함락시 치열했던 역사의 흔적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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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치열했던 동래읍성 전투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관이 개관됐다.
부산도시철도공사(사장 안준태)는 지난 28일 부산도시철도 4호선수안역에서 허범도 부산시 정무특별보좌관, 이진복 국회의원등 200여명 참석한 가운데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개관식을 가진 것.
 
도시철도 최초역사관인 ‘동래읍 성임진왜란 역사관’은 지난 2005년부산교통공사의 수안역 건설현장에서 조선전기 동래읍성의 해자가 발견되면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해자는 성 밖에서 땅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한 도랑. 이 해자에서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에서 희생된 수 많은 인골과 함께 다양한 무기류가 출토되어 당시 전투의 참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임이 확인됨에 딸 당시의 참혹함과 선조들의 항쟁을 모두가 기억할 수 있도록‘역사관’을 건립하게 됐다.
 
총 27억원의 예산투입으로 1,029㎡규모로 전시실, 기획실, 해자단면연출, 전사, 그래픽 연출 등 크게 4개 공간으로 구성되어있다. 유물전시 및 보전전문기관인 부산박물관이 관리를 맡고 휴관일은 월요일과 설, 추석 등으로 이를 제외한 매일오전 10시~오후 8시까지 운영하며
수안역 개통전까지(3월중 개통예정) 수안역 1번 출구를 이용할 수있다.
 
주 전시공간은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장면을 생생하게 재현을 시킨 동래읍성 출토모형과 동래읍성 해자 출토유물, 동래읍성 해자, 조선시대 무기체험 등 동영상을통해 당시의 상황을 체험할 수 있는 영상실이 설치되어있다. 동래읍성모형은 임진왜란 때의 동래읍성을성벽 및 해자 발굴조사와 ‘동래부순절도’를 토대로 조선전기 읍성의 성곽과 건물의 배치를 고려해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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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전시물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발굴현장 그대로 재현한동래읍성 해자다. 해자는 성벽에서 약 30m 떨어져 축조된 해자는 폭5m, 높이 1.7m~2.5m 정도로 동쪽 석축은 깬 돌을 이용하여 13~14단정도 올렸고 서쪽 석축은 너비 3m,높이 1.5m정도 쌓아 온천천의 범람을 막은 다음 올렸다.
 
석축의 맨 아래에는 크고 넓적한 돌을 놓고, 그위에 돌을 들어 올려서 안정되게 8단 이상을 올린 게 특징. 해자 내부에는 임진왜란 당시 참상을 느낄 수있는 칼에 베이거나 두개골에 구멍이 난 인골과 칼, 목궁, 화살촉 등의 출토 무기류를 그대로 전시했다.
 
한편 수안역 대합실 입구와 캐노피는 홍예문을 모티브로 연출하고승강장 벽면은 임진왜란도, 동래순절도, 동래부사집 왜사도가 설치되어있어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의 의미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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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태 부산교통공사 사장은 “수안역은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부산도시철도의 대표적인 테마역사로 기억될 것”이라며 “자라나는 세대에게 생생한 역사체험장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부산박물관과 다양한 기획전시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박용수 취재부장
 
다시보는 역사>>임진왜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왜(일본)가 우리나라를 침입한 전쟁. 음력 4월 14일에 부산진성이 궤멸당하고 이튿날 동래읍성이 함락된 지한 달이 안되어 서울이 적의 수중에떨어졌으며, 달포 안에 평안도와 함경도가 유린당했다.
 
일본이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오랜 싸움에서 얻은 강력한 무력을 국외로 방출하고자 일으킨 전쟁. 당시우리나라는 전국 곳곳에서 의병, 의승군의 분기 및 조선 수군의 활약과 더불어 조.명 연합군의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왜군을 물리치고 전쟁을 종료했다.
 
당시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 3국의 국력을 총동원하여 벌였던 국제전이자 조선왕조 최대의 국란으로 중국은 명 청 교체의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은 봉건제후의 세력이 몰락하고 도쿠가와막부가 성립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1626년 인조 4년의 경연에서 영의정 이원익은 “난 후의 인구가 평상시의 6분의1도 못된다”고 할 정도로 극심한 인명의 희생이 있었다.
 
또 왕의 피난으로 노비들이 그들의 문서를 보관한 형조와 장예원을 불살라 경복, 창덕, 창경궁 등 세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박용수 취재부장bys4900@naver.com
 
[2011년 2월 18일 제16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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