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10월 23일

종합

광야에서 뛰었던 여전사 … 불꽃같은 삶

-박차정의사 그는 누구인가
 
 
7.jpg
 
봉건주의·여성 불평등 타파 독립운동 선봉장
국내외서 맹활약, 독립운동위해 자녀도 포기
항일 분위기에서 출생하고 성장
 
 
현시대에 와서 새삼 그의 활동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식민지시대 국내외를 종횡무진하며 광야의 전투에 몸소 출전 어느 독립운동가보다 치열하게 싸웠던 여전사, 34세 짧은 생애동안 국가를 위해 헌신하다 불꽃처럼 가버린 그는 유관순 열사와 함께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우리나라 대표적 여성독립운동가다.

여필종부에 당당히 맞서며 가부장제 봉건주의 타파와 여성해방을 주장했고, 민족운동 독립운동에 힘써온 박차정의사(朴次貞, 1910~1944).
 
박차정은 부산 동래에서 박용한과 김맹련의 3남2녀 중 넷째로 출생했다. 측량기사였던 그의 부친은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에 비분강개하여 1918년 유서한통을 남기고 자결하였고, 그녀의 어머니 쪽가계 역시 민족의식이 강한 집안이었다.

태어나 자란환경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식민지 현실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해 주었고, 자라면서 1924년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 1925년 동래 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하면서 그동안 키워온 그녀의 항일의식이 더욱 강해졌다.
식민지 현실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해 주었고, 자라면서 1924년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 1925년 동래 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하면서 그동안 키워온 그녀의 항일의식이 더욱 강해졌다.

많은 민족운동가를 배출해 내기도 했던 일신여학교는 1919년 3.1운동 시에 부산지역 만세운동 전개에 큰 공헌을 했다.

박차정은 이때부터 우리민족의 비극을 말하면서, 이 비극을 극복하는 길은 독립이고, 애국지사들이 벌이고 있는 독립운동에 모두 동참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다녔다.

당시 박차정의 항일의식은 동래일신여학교의 교지였던 ‘일신(日新)’2집에 실은 ‘철야’라는 글 속에도 나타난다. 일제하 우리민족의 고난을 상징화하여 어려운 가운데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서 이겨나가겠다는 민족해방에 대한 강한 염원을 담고 있는 글이다. 문재가 뛰어났던 박차정은 이외에도 시 ‘개구리’, 수필 ‘흐르는 세월’ 등의 글을 교지에 싣기도 했다.
 
근우회 여성운동 지도자 활동
박차정이 전국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의 주도층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근우회 활동에서부터다.
 
1927년 설립된 근우회는 기독교세력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계열의 여성단체와 사회주의계열의 여성단체들이 모두 참여한 통일기관으로 출발했다.

반제, 반봉건운동을 내걸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일제차별 철폐, 일체 봉건적인습과 미신타파, 인신매매 및 공창의 폐지, 농민부인의 경제적 옹호, 부인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산후 임금 지불 등을 주창하였다.

이때 박차정은 경남의 전형위원, 33인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 그리고 33인 중 14인으로 선정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을 담당하며 핵심간부로서 활동했다. 1929년 전국대회에서 ‘동일노동에 대한 임금차별 철폐건’을 선생이 주도한 동래지회에서 건의하기도 했다.

1930년 박차정과 근우회 허정숙이 “대중적 위력으로 민족적 항의를 보여줌으로써 구속학생(광주항일학생운동)을 석방하고 민족적 기치를 들기 위해 시내 각 여학교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도하자”고 결의한 서울여학생시위사건은 근우회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이 되었고, 중심역할을 했던 박차정은 이로 인해 검거, 구속되기를 반복했다.

중국으로 망명, 결혼, 의열단 활동
같은 해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당시 북경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주력하고 있던 김원봉 선생의 의열단에 합류하여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주앙부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박차정은 경남의 전형위원, 33인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 그리고 33인 중 14인으로 선정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을 담당하며 핵심간부로서 활동했다. 1929년 전국대회에서 ‘동일노동에 대한 임금차별 철폐건’을 선생이 주도한 동래지회에서 건의하기도 했다.

1930년 박차정과 근우회 허정숙이 “대중적 위력으로 민족적 항의를 보여줌으로써 구속학생(광주항일학생운동)을 석방하고 민족적 기치를 들기 위해 시내 각 여학교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도하자”고 결의한 서울여학생시위사건은 근우회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이 되었고, 중심역할을 했던 박차정은 이로 인해 검거, 구속되기를 반복했다.

중국으로 망명, 결혼, 의열단 활동
같은 해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당시 북경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주력하고 있던 김원봉 선생의 의열단에 합류하여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주앙부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김원봉 선생과 결혼한 후 남편과 함께 의열단의 핵심 멤버가 되어 활약하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설 여자부의 교관으로 교양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이때부터 박차정은 ‘임철애’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지게 된다.

대개 의열단 단원이었던 혁명학교의 교관들은 학생들에게 각종 비밀공작법을 가르치며 학생들의 혁명의식강화와 실천운동에 필요한 변론을 훈련시켰다.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조선과 만주에 의열단 지부를 만들고, 노동자, 농민, 학생 등의 기본군중에 기초하여 유격대를 조직하게 하는 임무도 부과했다.

또한 1935년 의열단은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단, 대한독립당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박차정은 핵심멤버로 활동하였다.

민족혁명당의 남경부녀회 결성·활동
1936년 지청천 장군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혁당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을 전체 민족해방운동에 편입하고자 하였다.

해외조선부녀의 총단결로 전민족적 통일전선을 편성하기 위해 결성된 부녀회는 오랫동안 민족문제와 여성문제를 고민하고 실천해온 박차정의 생각과 맞닿아 있었다.
 
 
이후 박차정은 민족혁명단이 1937년 창립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만국부녀대회에서 한국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장사에 있었던 임시정부에 특사로 파견되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규탄하는 라디오방송을 하고, 방송원고를 중국어로 번역해 ‘조선민족전선’ 창간호에 ‘경고일본적혁명대중’이라는 글을 실었다.

또한 ‘조선민족전선’ 제3,5,6호에 ‘조선부녀여부인운동’이라는 장문의 글도 실었는데, 이 글에서 박차정은 여성운동을 3.1운동 이전과 이후, 1927년 이후와 광주항일학생운동 이 후 시기로 나누어 고찰하고, 중국의 전면 항일전쟁이 시작된 이 시점에서 우리 부녀자들도 일치단결하여 일어나 민족해방전쟁에 참여, 조국자유회복, 동아시아의 화평, 인류의 정의를 위해 투쟁하자고 호소하였다.

조선의용대의 복무단장 활약
이후 1938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은 한중연합전선의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였고, 박차정은 부녀복무단의 단장을 맡아 여성대원들의 선봉에서 싸웠다. 1939년 곤륜산 전투에 참가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서다 부상을 당한 후 그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해방을 1년 앞두고 치열했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박차정의 유골은 그녀의 남편이었던 김원봉 선생의 고향인 경남밀양 감전동 뒷산에 안장되었다. 박차정은 명실상부하게 이론가로서 또한 실천가로서 민족해방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주도하였던 인물로 그녀가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일부에서는 그녀의 사회주의 성향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있으나, ‘독립’이라는  분명한 목적아래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이용한 것은 구분되어 판단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다.
 
■자료 참고
국가보훈처, 부산여성가족개발원 발행
‘근현대 속의 부산여성과 여성상
유정은 기자
[2011년 11월 18일 제25호 6면]
 
 

추천0 비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