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5주년 기억의 전쟁 잊혀진 용사들
훌리오 까세레스, 로물로 올라야, 아르끼메데스 로드리게스, 벤하민 포르뚜올, 뻬드로 빠블로 고메스, 호르헤가비리아, 루이스 세쁠베다 그리고 이디아스 인까피에링콘.....
이들은 우리의 기억속에 단 한 번도 머물러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더욱이 자국정부와 국민들에게는 철저하게 버려져 잊혀진 그저 병들고 초라한 80세의 노인일뿐이다. 이들은 자유세계의 민주주의 수호라는 정부의 인도주의적 대외명분에 따라 1951년 5월 21일 부산으로 향하는 미 군함‘아이켄 빅토리호’에 몸을 실었던 콜롬비아의 청년들이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왜 자신의 조국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한국파병을 단행했는지 알지 못한 채, 파병부대 “바따욘 콜롬비아”의 일원으로 국가의 명예를 드높이겠다는 신념으로 가득했던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이었다.
전통적으로 콜롬비아의 대외정책은 국내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보조적 방편으로서 국내정치 연장선에서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자유-보수 양당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정치적 폭력사태가 확대되던 시기 그동안 국제분쟁에 냉담했던 콜롬비아가 왜 무엇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게 되는지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동일한 국제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개별국가의 외교정책이 서로 차별적이라는 점은 그 원인을 국내적 원인에서 찾게 된다. 콜롬비아의 정부가 제시한 대외명분은 진정한 참전의 동기는 아니었으며 정부의 정치적 목적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한 국가의 대외정책은 국가 내부에서 진행되는 정치, 경제, 군사 그리고 사회적 질서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46년 콜롬비아 사회는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자유-보수 양당갈등이 확산되었다. 국가는 정치 사회적 불안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권력과 능력도 상실하고 있었다. 당시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아 대선에서 당선이 유력시되었던 개혁자유주의 지도자 가이딴(Jorge Eliecer Gaitan)은 보수세력 존립의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자유당내에서 온건파가 보수당후보를 지지하여 자유당이 분열함으로써보수당은 16년 만에 정권을 장악했다. 역사적으로 콜롬비아 양당엘리트들은 정당의 패권이 바뀌면서 정치적 불안이 고조될 때 상호 정치적 제휴를 통해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해 왔다.
따라서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허용되지 않는 상태에서 콜롬비아 정당들은 보수일변도의 정치이념으로 기본 성격을 유지했다. 1948년 가이딴이 암살되자 정치적 갈등은 보복적 성격을 띠며 혼란은 심화되었다.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보수당은 자유당의 온건파와 제휴하여 연립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대립과 불안해소에 실패함으로서 집권당은 폭력적 방법을 통해 권력기반의 강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 보수 독재체제에 반발한 지식인들의 지원으로 조직적인 게릴라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군부는 도시를 중심으로 확산된 폭력사태와 반정부 활동 탄압에 동원되었다. 1950년 자유당은 대선 출마를 포기하게 되고, 보수당의 고메스(Laureano Gomez)는 단독으로 출마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패권주의적 양당체제 속에서 고메스 정부의 선결과제는 정치적 안정이었다.
한편, 냉전체제에서 라틴아메리카는 미국과 강력한 유대를 과시했다. 트루만 독트린 이후 체결된 상호공존에 관한 미주공약을 통해 미국과 다국적 또는 쌍무적인 군사협정을 체결하였다.
핵 및 미사일 전략시대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 안보에 있어서 미국의 군사력과 방위 공약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집단안보 체제구축을 통한 공동방위 조약은 공산주의 팽창에 대한 미국의 대외정책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쿠바혁명을계기로 민족주의 물결과 민중주의 경험이 살아있는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반미주의를 차단할 수 있는 방안으로 활용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지역을 대상으로 집단안보체제의 도덕적 책임을 촉구했다. 미국의 적극적인 한국전 개입정책은 콜롬비아 정부의 참전으로 인한 안보, 경제, 정치적 이해관계와 상호 작용하면서 1951년 콜롬비아군의 한국파병은 추진되었다.
아르헨티나, 니카라구아, 페루, 브라질은 참전에 관심을 표명했으나, 다국적군 편성을 위한 자원병 모집은 구체화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역 국가들은 한국전쟁을 서반구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호공존에 관한 미주공약상의 의무를 실행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군사 전술과 최신 전투 장비가 투입된 전쟁이었다. 당시 콜롬비아 군은 장기간의 국내폭력사태로 인한 무력감, 사기저하, 실전경험 부족 등 군 운영상의 문제점이 노출되어 심기일전의 전환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콜롬비아군의 한국전참전은 군의 현대화를 확보할 호재로 인식되었다.
또한 콜롬비아 정부는 한국전이 단순한 한민족간의 내전이 아닌 미.소 지원 하에남한의 적화를 기도한 공산세력의 팽창적 전략전쟁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반공주의를 국내 정치적 갈등 및 기존질서에 대립하는 모든 형태의 대항이념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활용하였다.
결국 콜롬비아군의 한국전 참전은 미국의 요청에 따른 불가피한 파병이라기보다는 당시 대내적 위기상황 속에서 보수정부가 한국 파병을 주체적으로 선택함으로써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1951년을 시작으로 1953년 까지 총 4058명의 콜롬비아군이 참전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156명 사망, 610명 부상 그리고 69명이 실종되었다.
[2015년 6월 25일 제65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