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멈추듯 성장동력을 잃고 방치된 황령산 스키돔. 곧 시민친화적 공간으로 재탄생될 전망이다.
번영로의 구서쪽 대연터널을 나서면 눈에 들어오는 광안터널 위의 스키돔은 오늘도 방치된 채 서있다. 무려 1천 800억이 투입되어 건물을 완공하고 2008년 5월 개장 후 불과 9개월 만에 부도가 나서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 큰 기대를 품고 240명의 분양자들이 합계 640억을 투자했지만, 지금은 한 푼도 못 건지고 회한의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고 있다. 계약금 내지 중도금으로 1억에도 못 미치는 미등기 투자자도 많지만, 등기 분양자 중에는 6억에서 20억까지 투자하여 일부는 지금도 매달 수백만 원의 은행이자를 갚아 나가면서 고통에 못 이겨 자살하기도 하고 큰 병이 든 사람도 부지기수다.
누가 무엇을 잘못하여 도심의 흉물로 방치되고 그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을까. 당시 사업을 추진했던 H회장은 사재를 130억 투자하고도 차디찬 감옥에서 4년을 보내야 했고, 필자역시 당시 황령산스키돔 추진의 부산광역시의 담당과장으로서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사업가로서 공직자로서 스키돔의 성공을 위해 정말 열정적으로 추진했던 사람들, 수익을 기대하고 투자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정녕 죄값을 받고 고통을 당한 것이 정당한가.
정치적 입지만 생각하며 모호함으로 일관하던 당시 시장의 무책임함, 그때 순조롭게 추진되어 바로 개장했더라면 4계절 스키를 즐기는 부산의 관광명소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다. 설사 부도가 났다 하더라도 모두가 그렇게 심한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확신한다.
황령산스키돔 개발구상
황령산스키돔은 필자의 아이디어와 H회장의 사업제안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짐으로써 시작되었다. 2000년 1월 스키돔의 적지를 찾아 보고하라는 시장지시가 도시계획국에 떨어졌다.
마침 황령산유원지 운동시설지구는 폭 60미터, 길이 250미터로 경사지게 파헤쳐 놓은 채 방치되어 있어 스키돔의 적지라고 생각하여 현안업무보고 때 아이디어 차원에서 스키돔 추진을 포함시켰다.
나는 90년대초 일본유학 시절,지바현 후나바시와 쯔따누마의 2개의 스키돔이 평지 위에 스키활강을 위해 많은 철강재를 사용하여 경사지를 만든 스키돔에서 한여름에 겨울옷을 입고 여러번 스키를 탄 적이 있다.
놀랍게도 황령산은 더 이상 훼손 없이 경사지에 건물만 세우면 스키활강이 가능하도록 경사를 따라 파헤쳐져 있어 큰 비용을 안들이고 스키돔을 만들 적지라고 생각했다.
도심에 위치한 황령산의 대부분이 유원지로 결정되어 있고 스키돔지역 4만 평이 운동시설지구로 지정되어 라이프플랜(주)에서 실내승마장, 수영장 등을 계획하여 1992년에 부산시로부터 인가를 받아, 기반조성을 위해 덤프차 만 대분의 토사를 절취하여 반출한 후 방치되어 있던 곳이다.
기초 토공작업에 엄청난 비용을 쏟아부었지만, 실내승마장과 수영장 건설에 들어갈 비용을 감안할 때 사업성에 자신이 없었던지, 더 이상 진척되지 않고 산중턱이 파헤쳐져 있어, 1994년 4월 공원개발계장을 맡은 필자가 수차례나 추진을 독려한 적이 있다. 큰 비가 오면 경사면을 따라 토사가 흘러 대형 산사태위험도 있고, 번영로에서 보이는 흉물로 도시미관을 헤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라이프플랜(주)는 도심의 유원지라 하여 한솔건설에 23만 평에 달하는 부지를 팔고, 한솔건설은 1997년 많은 비용과 인력을 들여 온천개발계획을 내놓자, 부산의 환경 시민단체는 황령산살리기시민연대를 결성하여 거센 반대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한솔건설은 언론보도에 앞장섰던 P일보 L기자에게 막대한 피해의 배상을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등 강력하게 나왔으나, 민주화 이후 힘을 키워온 시민환경운동을 이길 수 없었다.
그동안 23만평의 부지매입, 온천개발계획 등 400억이 들어갔다는 한솔건설은 사업성이 없는 운동시설지구를 휴양시설지구로 바꾸어 콘도 300동을 짓겠다는 계획을 들고 1999년 8월 담당과장인 필자를 찾아왔다.
온천개발 반대의 트라우마가 있는 황령산중턱에 대형 콘도는 시민정서상 어려움을 설명하고 사업성과 공익성을 고려하여 다른 시설을 구상해 볼 것을 종용하고, 사안의 중대함을 감안, 간부회의에도 상정해 토론이 오갔지만, 콘도개발은 모두 반대였다.
다른 시설을 구상하면서 스키돔 추진도 권유했는데, 원주에서 한솔리조트와 스키장을 운영하는 한솔건설로서 타당성은 있지만, 이미 400억이 들어간 상황에서 다시 그만한 투자를 해서 수익을 맞추기 어려울 것이라며 희망사업자가 있다면 소개해달라는 당부도 하면서 만일을 대비해 온천개발도 계속 추진했다.
일단 회사운영의 절박함을 생각하여 시장에게 보고했다. 2000년 8월의 도시계획사업 인가기한에 쫓기던 한솔건설로서는 온천개발 불가처분에 소송을 제기하고 콘도 수를 줄여 신청을 하겠다고 한다. 기한내 사업착수가 안되면 사업은 취소되고 그동안 투입된 400억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마침 2000년 1월, 스키돔사업을 희망하여 적지를 찾아달라며 시장에게 부탁했던 H회장이 직원들을 데리고 직접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늦은 오후, 담당인 K계장에게 H회장을 황령산 현장에 안내하도록 하고 나중에 돌아와 K계장의 보고를 들으니 H회장이 그 자리에서 스키돔의 최적지라고 하면서 한솔건설과의 거래주선을 요청했다.
바로 국장과 시장께 보고하고 K계장을 H회장과 동행하여 서울의 한솔건설을 방문하여 한솔로 하여금 H회장에게 사업권을 넘길 것을 권유했다.
양측 간의 본격적인 흥정이 시작되고, 그해 3월23일 나의 안내로 H회장이 시장실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시장은 부지매입과 이후 행정절차를 적극 돕겠다고 구두 약속했다.
인가기한을 넘기면 매몰비용 400억을 날리고 사업재개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절박한 한솔은 전체 면적 23만평의 공시지가 만이라도 생각해, 96억을 제시하고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H회장은 처음에 23억을 제시하여 서로 간에 밀고당기는 흥정 속에 4월 20일경, 68억에 잠정 낙착되었다.
68억에 낙착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4월 21일 부산일보 1면에 “황령산개발 망령재발”이라는 대문짝만한 제목으로 나면서 각 언론에서 경쟁적으로 보도가 되었다. 3월초부터 낌새를 눈치 챈 부산일보 J기자에게 거래가 성립될 때까지 보도자제를 요청한 상태였는데 양측의 거래가 성사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특종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부산일보가 제1보를 터뜨린 것이다.
제목은 부정적이있지만, 긴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나의 논리를 반영하여 스키돔의 긍정적인 면과 사업추진의 불가피성을 부각시켜 주었다. J기자를 포함해 나의 설명을 들은 기자들은 대부분 사업의 전망과 불가피성을 수긍하면서도 막상 보도가 될 때는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는데 차츰 중립 내지 긍정적으로 변해 갔다.
당시 부산의 시민사회 운동 역사상 처음으로 부산의 65개 시민단체가 같이 나서서 황령산온천 개발에 결사반대했기 때문에 쉽게 찬성 모드로 돌아서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어쨌든 언론에서는 큰 호기심을 갖고 연일 황령산스키돔 관련 보도를 하자, 4월25일 급기야 시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시민이 반대하면 추진 않겠다”고 하여 신중 모드로 돌아섰다.
며칠 지나 체육행사에서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하형주교수가 동계스포츠가 약한 부산에서 스키돔은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시장은 시민들이 찬성하면 추진하겠다고 답하면서 배석한 체육과장에게 담당과장에게 전달하여 시민들을 잘 설득해보라는 지시도 했다.
크레믈린이라는 시장의 별명대로 모호한 태도에 국장 등 간부들도 모호한 태도로 나왔지만, 우리보다 더 자주 접촉하는 H회장과 나는 시장의 의중은 확고하다며 조심스레 준비하자고 서로 격려했다.
부산시장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대응
언론에서도 부정적인 면보다는 적법한 민간사업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강해졌지만, 시장의 결단은 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나는 A4 1장에 황령산스키돔의 불가피성을 요약정리하여 간부를 비롯한 공무원, 기자, 시의원, 일반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설득에 나섰다.
황령산살리기시민연대 집행위원장 등 많은 시민단체대표들도 만나 설명을 하자 눈도 안 오는 부산에 무슨 스키장이냐며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던 많은 사람들도 긍정으로 돌아섰다.
5월에는 PSB(현 KNN)에서 주관한 TV토론에 내가 직접 나가 사업의 긍정적인 면과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9월에는 남구청과 여성신문에서 조사한 여론조사를 근거로 스키돔의 조속 추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12월 중순에는 MBC일요토론에도 나가 환경단체와도 설전을 벌였다. 환경단체의 주장은 파괴된 산지를 원상복구하라는데 정당한 사업인가를 얻어 진행 중인 사업을 허가취소하고 시에서 부지를 매입하여 나무를 심어 원상복구한다는 것은 상식과 이치로 따져도 말이 안 되는 논리다.
그런 논리라면 부산은 산지가 60%가 넘어 산에 많은 건물을 지었는데, 산에 지어진 아파트, 학교, 공공기관도 철거해서 나무를 심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산을 파헤쳐 건물을 새로 짓는 것도 아니고 이미 적법한 절차에 의해 터파기한 자리에 건물 하나 짓는 것으로서, 스위스는 국토의 대부분인 산에 케이블카, 호텔 등을 지어 관광대국이 된 것처럼, 사계절 스키를 즐길 수 있는 스키돔은 부산의 관광명소가 된다는 나의 주장에 반대하던 많은 사람들도 확실히 찬성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그런데 국장에게 보고하면 시장의 의중을 들먹이며 일체 언론과 접촉하지도 말고 다니면서 스키돔 얘기도 꺼내지 말라며 질책하면서도, 8월말 도시계획사업 만료 전에 6개월 연장하여 줌으로써 2001년 2월까지는 사업에 착수해야 하는 부담을 사업자와 부산시도 같이 안게 되었다.
2000년 6월에는 H회장의 초청으로 투자자인 네글레 EU상공회의소장이 부산을 방문하여 부산시장과 면담하고, 황령산스키돔 현장을 확인한 자리에서 최적지라며 옆에 있는 H회장에게 “You are brave.“하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곧 160억의 외자를 유치했지만, 결국 나중에 엄청난 위약금을 물고 돈을 돌려주어야 했다. 여론이 잠잠한 가운데 기자들이 간혹 찾아와 어떻게 할 거냐, 왜 빨리 추진하지 않는냐는 물음에 곤혹스레 답을 하면 언론에서는 곧 착수한다느니, 환경단체는 반대한다느니 하며 계속 보도가 되고 12월 MBC토론에서 환경단체 대표가 스키돔을 추진하면 시장 퇴진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언급도 했다.
2001년 1월 중순, 시장결재를 들어가니 “자네가 TV토론에서 응대를 잘못했다”하는데, 아마 “스키돔 추진을 하면 시장 퇴진운동을 벌이겠다”는 대목에 내가 무응답으로 대응했던 부분을 말하는 것 같다.
1월 30일 오후 1시 조금 지나 사무실에 들어서자 총무과 직원이 전화로 녹지사업소장으로 발령 났으니 2시까지 시장실로 내려오라고 했다. 시장으로서는 나로 인해 자꾸 스키돔이 거론되는데 부담을 느껴 녹지사업소장으로 발령을 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본청과장에서 사업소장으로 좌천되고 내손으로 스키돔을 추진하지 못한데 대한 엄청난 실망감으로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다.
이후 일체 스키돔 얘기는 잠잠해지고 2월 들어서 도시계획사업 기한을 다시 1년 연장을 하면서도 공무원들은 모두 긍정과 부정 사이에 오락가락하는 시장의 눈치만 보며 시간만 보내고 있고, H회장은 시간이 흐름에 따른 금융비용을 감당하면서도 설계용역과 사업조직을 만드는 등 사업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도시계획사업 기한인 2002년 2월 며칠 전에 2003년 2월까지로 다시 1년 연장을 해주라는 시장지시는 6월 시장선거가 지나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뜻으로 공무원들과 H회장은 확신했다.
시장이 재선되고 7,8월이 되어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 몇 차례 시장을 직접 만난 H회장은 시장으로부터 “알았다 국장에게 지시하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정작 국장은 먼 산만 쳐다보며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시청을 찾을 때마다 검토해 보겠다는 말만 하며 시간만 끌자,H회장은 그해 12월에 정당한 사업에 대한 조속한 허가승인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총리실에 행정심판을 청구하자, 총리실로부터 적법한 사업으로 허가를 내어줄 것을 결정 받았다.
그 과정에 H회장측에서 몇 차례 찾아와 “2000년 3월 23일 시장실에서 시장이 H회장을 적극 돕겠다는 의사표명을 하여 부지를 매입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확인서요구에 시장을 모시는 간부 입장에서 어떻게 내가 확인도장을 찍을 수 있는가 언론보도 정황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느냐면서 몇 번 거절하다 행정심판장에서 구두로 참고만 하는 조건으로 12월 22일(노무현대통령 당선 분위기에 자극된 측면도 있음) 결국 확인도장을 찍어주었다.
간단한 이 일이 나에게는 두고두고 조직의 배신자라는 트라우마로 나를 괴롭히는 엄청난 사건이 되고 말았다. 총리실 당담사무관도 구두로 참고만 한다고 했는데 20쪽의 행정심판재결서에 나의 확인서 내용이 인용되어 있고 보통 제목만 읽던 시장은 20쪽을 전부 읽어나가다가 그 대목에서 격노하여 나를 당장 파면시키라며 큰 소동으로 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