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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영면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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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전 마가렛 대처 총리가 지난 4월 8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향년 87세. 대처 총리는 19세기 초 이후 가장 최장 기간인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집권했다.
 
마가렛 대처는 '영국병'이라고 불리는 사회복지 정책을 고치고 경제부흥을 이끈 철의 여인.마가렛 대처 총리는 재임기간 동안 펼친 사회경제정책의 총칭 일명 ‘대처리즘’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핵심골자는 정부 재정지출의 삭감, 공기업의 사영화, 자본에 대한 규제 완화와 경쟁의 촉진, 노동조합의 권한 축소 등으로 압축된다.
 
대처가 총리로 취임한 1979년 영국은 이른바 고비용 저효율의 ‘영국병(British disease)’에 시달리고 있었다. 실업자가 160만 명에 달했고, 이자율과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만성적인 국영기업의 노사분규와 과도한 사회보장제도로 영국 사회는 생산성이 뒤떨어지고 곳곳에서 피로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1979년 정부의 전체예산에서 복지예산은 45.7%를 차지할 정도였다. 또한 노동당 집권당시 과도한 기업의 국유화는 당초 이상과 달리 기업의 경쟁력 약화를 불러왔다. 관료주의적 경영에 따른 효율성 저하와 경쟁제한에 의한 민간부문의 활력저하, 근로의욕의 저하 등을 낳은 것이다. 대처는 바로 이 시기에 집권한다. 바로 신자유주의, 보수주의, 반공주의,반노동조합주의의 ‘대처리즘’이라는 히든카드를 들고 말이다.
 
자유의 상징 ‘대처리즘’으로 경제 부흥이끈 강력한 지도자
“소수에게만 이익” 관료주의적 경영 피해자 부정적 인식도
 
총리 취임 당시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국영기업이 가장 많았던 나라 영국, 그러나 대처 치하에서 이들 대부분은 민간자본에 팔리는 사영화의 길을 걷게 된다. 즉, 수송, 석탄, 에너지, 통신, 철강, 조선, 자동차, 항공 등 영국 산업의 중핵을 이루는 국영기업을 대부분 팔아 치우고 만다.
 
이로 인해, 1979년 당시 국영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수는 약 200만명, 생산량은 GDP(국내총생산)의 10분의 1을 차지했다. 그러나 사영화가 진행된 후인 1988년에는 국영기업 노동자수가 약 100만 명으로 줄고 생산량은 GDP의 6%까지 감소했다.
 
특히, 대처는 경제 활성화를 위해 기업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규제완화와 외환관리를 전폐하고, 금융시장 활성화에 사활을 걸어, 제조업의 나라에서 금융업의 나라로 경제의 중심을 급속하게 이동시켰다. 그 결과 그의 임기가 끝날 무렵 영국 제조업은 몰락했으며, 금융업이 영국경제의 중심으로 우뚝 선다.
 
이러한 대처리즘의 관철은 그녀에게 ‘철(鐵)의 여인(The Iron Lady)’이라는 별칭을안겼다. 대처는 집권 당시 이 별칭을 즐겼다고 한다. 대처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 언론은 앞다투어 세계 지도자들의 추도사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는 위대한 자유의 투사를 잃었다”면서 전 총리의 죽음에 애도의 뜻을 전했다. 독일의 여성총리인 앙겔라 메르켈 역시 “그는 뛰어난 지도자이며 많은 여성들의 본보기였다”라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국가 간의 외교관례에 따른 추도사와는 상반된 평가도 나왔다. 일부 영국 국민들은 “대처리즘의 직접적이고 1차적 피해자”라면서 “대처리즘은 지금도 우리를 파괴시키는 국가적 재난”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영국 탄광노조(NUM)는 8일 성명서를 통해 “대처 이후 계속된 보수당 정부의 정책은 자랑거리가 아니다”면서 “대처는 자유로운 시장의 상징이었지만 이들이 취한 이익은 소수에게만 돌아갔다”고 비판했다.
 
그녀의 장례식은 당초 국장으로 치려질 예정이었지만 영국 내 사회분위기가 부정적으로 쏠리면서 국장보다 한 단계 낮은 공식 장례(ceremonial funeral)로 치러졌다.
 
서기량 기자
[2013년 4월 25일 41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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