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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총스님의 마음의 등불

우 리

혜총스님의 마음의 등불<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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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남이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 중에 ‘우리’라는 말처럼 다양하게 통용되는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외국 유학을 간 학생이 겪은 이야기다.
 
외국인 학생이 혼자 사는 한국인 친구에게 주소를 묻는데, “우리집 주소는 어디 어디야.”라고 대답하니 그 외국인이 “너 혼자 사는 것 아니야?”하더라는 것이다. 혼자 살고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우리 집이라고 하니까 이해될 리 없다. 우리라는 말이 의식 속에 박혀 있다가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것이다.
 
이 ‘우리’라는 말이 참 난감하게 쓰일때도 있다. 자기 남편이나 아내를 지칭할때도 우리라는 말을 쓴다. ‘우리 남편’, ‘우리 집 사람’, ‘우리 마누라’라고 하면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남편이요, 아내란 말이 되니 내 아내가 너의 아내도 되고, 내 남편이 너의 남편도 된다. 따져보면 우습지만 이 ‘우리’라는 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들의 무의식중에 작용하며 삶의 전반에 녹아 있다.
 
‘우리’라는 말을 쓰게 된 배경에는 한민족의 의식구조와 관계가 깊다. 동양 문화권의 사고방식은 둥글게 순환하는 원형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 끝이나 마지막이 없다. 매사가 둥글게 돌아간다. 선과악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만 영원한 선도 영원한 악도 없다. 그러니 나쁜 사람이라고 모진 욕을 하다가도 어느 정도 사건이 마무리되고 시간이 흐르면 용서하고 어울린다. 아무리 지옥에 떨어질 잘못을 한 악당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구원받을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이것이 동양문화의 원형적 사고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라는 공동의 울타리를 만들고 사는 것이 가능하다. 숫자 개념에서도 둥글둥글하기는 마찬가지다. 둘에서 하나를 빼면 산술적으로는 분명히 하나여야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영(0)이 되기도 하고, 하나도 빼지 않은 둘이 되기도 하고, 전부가 되기도 한다. 단편적이지 않고 공간적이다. 하나 속에 전부가 들어있고 전부가 하나일 수 있는 무한한 우주세계의 실상이 우리 생활 속에 묻어나 있는 것이다.
 
우주의 본바탕에서 ‘우리’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우주가 바로 우리이고, 우리가 우주이다. 우리의 몸도 수십억의 생명이 결집된 작은 우주인 것처럼 우리라는 개념이 없이 ‘나’라는 존재도 없다. 인도의 어느 사원은 낮이나 밤이나 언제나 어두컴컴하지만 모임이 있는 날에는 군중들이 모두 작은 등잔을 들고 사원에 모인다. 사람이 하나둘 모이면서 그밝기는 점점 더 커진다. 모든 사람들이 사원을 꽉 채우면 사원은 장엄한 빛의 공간이 된다. 그렇게 모임을 다하고 신도들이 하나둘 떠나가면 다시 어둠이 찾아온다. 작은 하나들이 모여 큰 하나가 되는것이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란 말도 하나를 이루는 동양의 지혜를 그대로 보여준다. 열 사람이 한 숟가락씩 밥을 보태면 한사람이 먹을 만한 양식이 된다는 뜻이다.그 속에는 하나라는 바탕을 중시하는 문화의 공통분모가 들어있다. 이 ‘우리’라는 바탕을 중시하는 문화가 어느 때부터 현상을 중시하고 단편적인 서양문화에 의해 우리 주변에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의 만장일치 속에 의사를 결정하는 신라시대 화백제도는 아니더라도나라의 발전이라는 공동목표 아래 어느정도 힘을 모으는 모습은 보기 드물고 서로를 헐뜯기만 하는 정치권부터 부모 모시는 문제로 형제들이 서로 낯을 붉히고 등을 돌리는 이기주의에 물든 가정, 남의 생명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우리의 모습이 슬프다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 남인가?
 
[2015325일 제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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