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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수의 세상만사

대우 김우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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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 김우중 회장이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파란만장해서일까, 좀 이른 느낌 지울 수가 없다. 아쉬운 맘 또한 크다. 고인의 이름 석 자와 함께 또 다시 내 머릿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이미지 둘과 사건 하나가 그의 영욕을 대변한다.

서울역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섰던 대우빌딩이 그 영광의 첫 번째 이미지다. 붉은 색 감도는 사각형 빌딩은 성공을 위해 부나방처럼 지방에서 상경하던 숱한 사람들을 숨이 멎듯 압도했다. 그리고 꿈을 꿨을 거다. 그들도 저 빌딩의 주인처럼 기필코 성공해보겠다고.

가난했던 내 유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안 누나, 여동생들은 도시로 나갔다. 겨우십대 중반이던 그들은 공장에서 일했고, 그들이 번 돈은 기울어가는 집안 부흥의 의무를 짊어진 아들들의 교육비 등으로 쓰였다.

명절 때마다 귀향한 그들의 입을 통해 ‘대우실업’이라는 거대한 기업을 알게 됐다. 물론 일에 대한 대가였겠지만, 먹고자게 해주는데다 공장 내에 야간학교까지 둬서 배움에 한 맺힌 어린 여성근로자들에게 주경야독의 은혜까지(?) 베풀었다고 들었다.

나중에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그 기업의 주인이 ‘김우중’이라는 자수성가한 젊은 경영인이었음을 알게 됐다. 대한민국 ‘샐러리맨의 신화’였던 그도 1997년 IMF 금융위기와 함께 무대 뒤로 사라진다. 승승장구하면서 철옹성 같이 단단하던 그의 대우그룹은 단 한번의 유동성 위기에 모래성이 되고 만다.

국내외 계열사 수백 곳에 수십 만 직원들을 거느리던 대우그룹은 한순간에 해체의 길을 걷는다. IMF위기는 그를 나락으로 내몬 치욕의 사건이었다. 그의 몰락은 오롯이 대한민국뭇 샐러리맨들의 몰락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아주 작은 꿈에 불과했던 ‘평생직장’ 기대감도 무너졌으니.

대학 졸업 이후 지금까지 여섯 번씩이나 직장을 옮기게 됐고, ‘신화’였던 고인도 내 머릿속에서 서서히 사라질 즈음, 부음이 전해졌다. 그답다고나 할까. 최근에 치매까지 앓게 된 고인은 삶이 구차해질까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일찌감치 연명치료까지 포기했다는 뉴스에 가슴저며 온다.

그가 우리 젊은이들에게 남긴 게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는 명언뿐일까. 17조원의 추징금도 남겼다는 보도가 몹시 씁쓰레하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의 기업가 정신은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승계할 만한 유산일 터이다. 그래야 그가 남긴 17조원이 추징금 아닌, 우리 미래세대의 투자금이 되지 않을까.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191220일 제1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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