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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참고 수긍하며 고개만 끄덕였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다”

여유포커스-그가 궁금하다
 
윤원호 대한민국 헌정회 여성위원회 위원장
 
 
 
'환경' '여성' '시민운동가' 근성으로 정치
지방출신 여성의원으로 최고의 자리 경험
 
 윤원호(67)대한민국 헌정회 여성위원회 위원장. 지방출신 여성정치인으로서 그는 독보적인 길을 걸어온 인물이다.
 
 17대 국회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의사당에 오른 윤위원장은 초선 비례대표 출신의원으로서는 최초로 국회 여당 여성위원장을 지냈고, 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초선의원으로서는 드물게 그가 경험한 정치세계는 넓고도 다양했다. 국회의원직을 한번으로 끝내기에는 아쉬움이 많은 사람이지만, 짧고 굵직하게 경험한 정치노하우를 지역발전을 위한 일에 환원하고 이제 여성정치 지망생들의 멘토로써 후배들에게 돌려주고 싶어하는 그다.

 “이제 정치는 안합니다. 그러나 부산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든 NGO 활동가의 자세로 돌아가 헌신할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그는 입버릇처럼 정치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누군가는 정치는 한번 몸담았다하면 마약처럼 끊을 수 없는 고질병이 된다고 말하지만, 그는 과감히 욕심을 버렸고,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지난 2년여 자기계발을 위한 내실있는 행보를 해왔다.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후 윤위원장은 국무총리실 산하 10.27 법난피해 명예회복 실무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불교계 활동에 주력해왔다.
 
 늘 새로운 자리 새로운 일의 중심에서 마침표 없는 왕성한 활동력과 추진력을 보여왔다. 10.27법난피해명예회복 실무위원장으로서의 그의 역할은 그 사안이 중차대한 만큼 아직도 현재 진행중인 사업이다. 꾸준히 이어온 중앙과의 연계고리를 통해 중앙의 발빠른 정보들을 놓치는 법이 없는 그는 타고난 정치감각으로 유용한 소스를 캐치해내고 이를 지역사회가 활용할 수 있도록 제언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지도자이기도 하다.
 
 세간에서 전직 국회의원들에게 연금조로 지원되고 있는 품위유지 지원금과 관련 말이 많은 것도 이해를 한다는 윤 위원장은 그러나 국가원로로서 정치 및 정책 노하우를 국가에 환원하고 제 역할과 기능을 다할 때 국민들 앞에 떳떳할 수 있지않겠냐며 “친목이나 제 위상만 생각하기보다 현재 국회 이슈가 ‘개헌’인 만큼 정치 원로들도 이제 목소리를 내야한다” 고 강조했다.
 
 “국민 최저 생계비보다 높은 지원금을 받는 사람들로서 할 일은 해야한다” 는 게 윤위원장의 소신이다. 그동안 헌정회 활동도 활발히 해온 윤위원장은 평소 개혁적 발언으로 원로들의 관심을 높이 샀다. 놀고 있는 강당을 재정구조가 열악한 여성, 시민, 사회단체들에게 개방, 언제든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헌정회가 앞장서 개혁의 분위기를 선도해나가자고 주장해왔다.
 
 그런 참신한 아이디어와 늘 공공의 유익함을 추구하는 윤위원장이 헌정회위원들의 엄청난 지지율을 끌어내며 여성위원회 위원장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동안 한나라당이 점유하다시 피해온 헌정회 여성위원장 자리는 야당출신의, 그것도 지방출신의 의원이 된 것은 전무한 일이었다. 소신있는 일에 대한 도전과 마음먹은 일은 하고야 마는 추진력, 이는 많은 후배 여성지도자들이 닮고 싶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윤위원장이 걸어온 길윤원호 위원장은 원래 교사출신이다. 진주 사범대를 나와 진주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다. 교사로서 그의 능력과 리더십이 처음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울산으로 발령받으면서. 당시 진주와 울산 즉 서부경남과 동부경남의 교육격차는 두드러졌고, 동부경남지역의 많은 학교에서 교육격차의 해법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쌌다.
 “울산으로 부임해오자마자 학교의 김모 교감선생님이 동부경남과 서부경남의 교육수준의 차이가 왜나는 지 3일내 조사하라는 과제를 받았다” 는 윤위원장은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조사, 선생 70여명이 참석한 종례시간에 그동안 꼼꼼히 분석 조사한 내용을 멋지게 브리핑해 프린트물까지 돌렸다고.
 
 당시 윤위원장은 지역 교육의 현실을 직시, 교감선생이 그동안 얻어내려 한 결과물을 제대로 도출해내 호평을 받았다. 그것을 교육현장에 도입, 문교부지정 우수학교로 지정받는 등 개인적으로도 교사상을 받는 쾌거를 만들어 냈다.

 어느 조직이든 구성원이 오래되면 동화되어 변화와 개선이 더디기 마련. 오히려 외부에서 들어온 자의 눈에 문제점이 정확히 비춰질 수 있었던 덕분이기도 하다는 그는 그러나 어느날 홀연 교사직을 그만두게 된다. 이때 받은 퇴직금이 40만원. 당시만해도 적잖은 목돈을 쥐었다. 그러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당시만 해도 산업안전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들이 많아 산업안전용품의 보급은 절실했던 때. 당시 녹산의 한선배 공장에 갔다가 산업안전보호관련 사업과 인연을 맺게 된다.
 
 안전용구의 미착용으로 재해를 입는 노동자들이 많음에도 관련 산업은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어 안타깝게 여겨져 막내가 두 세 살 무렵 어린아들을 들춰업고 양철 찬합도시락을 싸서 출근하다시피 현장에 나가 안전 마스크 끈을 다는 봉사도 자청했다.
 
 당시 친정쪽 사촌도 D조선에 근무, 가끔 사고가 나는 것을 보곤해 남의 일 같게만 여겨지지 않아, 경기가 어려워 사업이 잘 안된다는 선배에게 대뜸 퇴직금 전부를 빌려줬다. 그러나 1년도 못가 결국 부도가 나자, 당시 선배는 뜻있는 사업이니 한번 맡아해보라고 권유, 생각지도 못한 사업가로 나서게 됐다. 이후 산업안전 보호와 재해예방에 대한 남다른 문제의식과 관심으로 부산대 최고지도자과정시절, 산업안전보호관련 산업의 활성화 방안에 대한 소견을 논문에 담아내기도 했다.
 
 2남 1녀를 양육하면서 윤위원장은 학부모활동도 활발히 했다. 서구 대신초등학교 새마을어머니합창단 단장 시절 전국 어머니 합창대회에 참가, 장려상을 수상해오는 유치원 자모회, 부산시학교새마을어머니회장, 초중고 육성회장, 학부모단체에서도 리더십을 보여왔다.
 
 윤위원장은 학교급식 문제도 처음으로 제안했다. 첫 아이 고등학교 입학 후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도시락 5~6개 싸서 챙겨주는 일이 예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당시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학교 급식을 제안, 교육청에 건의서를 낸것. 이후 자체 급식을 일부분 시도하는 작은 성과를 내기도 했다.
 
 정치와의 인연 여성유권자연맹 어머니합창단장 시절 서울행은 윤위원장이 향후 정치적 길을 걷게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김정례 전보사부장관이 한국여성유권자연맹 부산지부장 자리를 권유한 것. 그때가 1983~4년. 당시 전상수 국제신문 부장을 찾아 의논 끝에 김수옥 전 여성정책연구소 이사장을 소개받아, 지부장을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김 전 이사장의 재임 6년기간 윤위원장은 실무를 뒷바라지 했다. 이때 중앙을 오가며 여성정치참여
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됐다. 한국여성유권자연맹 부산지부장을 역임하면서 윤위원장은 내재된 열정과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최대 규모의 여성단체였던 부산여성단체협의회에 단체 가입,
협의체 총무를 맡아 단체간 협의 조정 운영능력을 보였다.

 이후 여성단체에서 승승장구, 당시만해도 젊은 51세의 나이에 부산 여협회장직에 올라 연임까지 했다. 부산여협회장 시절 그는 많은 성과를 냈다. 더부살이 전전하던 여협시절을 끝내고 자체 사옥을 마련하는 여협의 새로운 역사를 기록했다. 관변단체의 기능에 머물던 단체의 사업과 역할을 확장, NGO기능을 강화했다.
 
 시민사회 변화를 주도하는 여성단체로 지역발전을 견인하는 선봉에 서기도 했다.

 여성단체가 여성적인 일에만 머무르지 않고 지역현안에 눈돌려 지역이슈에 동참, 변화를 끌어내는 주체세력이 될 것을 회원들에게 주문하기도 했다. 부산시민운동의 혁명으로 역사에 기록될 낙동강살리기 운동은 그를 안팎으로 키워준 최대 이슈다. 낙동강 페놀사건 발생이후 위천공단저지 낙동강살리기 대책위원회 상임대표를 맡아 온몸으로 맞서 환경운동가의 이미지를 새롭게 굳혔다.
 
 당시 청와대, 정부종합청사 등을 수십번 오가며 시위농성을 펼쳤다. “다행히 가족들도 한마음으로 농성에 참가, 열렬한 지지를 보내 힘을 얻기도 했다” 는 윤위원장은 양력 설 제사도 못 지내고 시청 집회현장을 지킬정도로 결사적으로 맞서 당시 언론에서는 ‘부산의 잔다르크’라는 호칭이 붙여졌다.
 
 이때 윤위원장 일행을 격려하기 위해 부산시청을 찾은 시민만도 6천여명이었다. 위천공단결사저지 대규모시민궐기대회까지 끌어낸 윤위원장은 이후 삼성차만이 부산의 살길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삼성차살리기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자진해서 삼성차 팔아주기 운동에 나서, 200여대가 넘는 차를 팔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사실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당으로 내가 가는 대신 부산의 삼성차하나만은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동지들과 협상했죠. 의견은 분분했습니다. 집과 회사로 협박전화도 많이 왔습니다.” 부산정서상 모두가 외면하는 정당, 소위 전라도당으로 간다고 어떤 시민들은 욕까지 해대며 난리였다고 그는 회상한다.

 99년 2월 DJ가 김해를 방문했을 당시 윤위원장은 미팅을 요청한 적이 있다. “모두가 만류하는 민주당으로 갔으면 삼성차 살려줘야 되는 것 아니냐” 고 따지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그러한 시민운동의 성과로 삼성차 살리기에도 일조했다.
이후 윤위원장은 부산여협 회장 임기를 마치고 부산지역 최초 여성 신문을 창간 발행했다. ‘여성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는 모토로 여성의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알리고 여성계가 소통하고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여성언론의 반석을 쌓은 이후 그가 내디딘 곳은 험난한 정치세계였다.
 
 당을 선점해온 남성들과 당당히 겨루어 유리천장을 뚫고 새천년민주당부산시당 위원장, 열린우리당 부산시당 위원장 등 정당시당 위원장에 오른 최초의 여성으로 정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17대 총선당시 특정 정당의 싹쓸이만은 막아달라며 부산의 정서에 눈물로 호소하며 삭발을 감행했던 결단력은 지금도 아릿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참고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면 여성인 내가 머무를 수 있었던 이 땅의 자리는 비좁고 남루한 그것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사회적인 차별이 있던 곳에서 또는 감당하기 힘든 혹은 이해하기 힘든 무조건적인 비난의 손가락질과 유치한 음해에 시달리면서도 목소리를 높였고, 항거의 삭발을 감행했다. 분노했고, 눈물을 흘렸으며 아우성을 쳐댔다. 그 모든 것은 여성인 내가 다른이들과 공존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바람 때문이었다.” 몇 해전 그가 펴낸 자전적 에세이 ‘여자,여자,여자’ 의 서두에 적은 윤위원장의 고백이다.

 윤 위원장의 이유있는 행보, 그가 움직이면 유익하다. 이제 개인의 공적을 넘어 부산여성의 자존심으로 대표되는 윤 위원장. 박순천 이후 부산이 낳은 걸출한 여성인물로 기록 될 그의 역사를 뒤이를 부산여성이 기다려진다.

유순희 발행인
[2010년 11월 15일 13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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