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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로맨스

공민왕의 영원한 신부이자 애절한 그리움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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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자와 몽골 공주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별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가 되어 굽이굽이 흐르고 있다. 후일 공민왕으로 등극했던 왕자 강릉대군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충혜왕의 아우로 어린시절을 연경에서 바얀 테무르(몽골식 이름)로 지내야 했다. 12살에 끌려가서 10년 동안이나 살았던 곳이다. 왜 그래야 했을까?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했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스칸은나라 이름을 ‘원’으로 바꾼 뒤 아시아는 물론 동유럽 땅까지 차지했다. 이런 여세를 몰아 고려를 침범했는데 1231년부터 1258년까지 거의 30년간 이어졌고 원나라의 지배가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원나라는 고려를 장악하기 위해 고려왕은 반드시 원의 공주와 혼인해야 되는, 소위 정략결혼을 감행했다. 1351년 강릉대군은 충정왕의 뒤를 이어 고려 31대 공민왕으로 즉위했고, 1349년 당시 강릉대군과 혼인했던 노국공주는 고려의 왕비가 된다.
 
그런데 철천지원수 나라인 원의 공주에게 왕은 어이하여 그다지도 매료되면서 사랑에 흠뻑 젖게 된것일까? 그들의 만남도 혼인도 매우 극적인 요소를 띄고 있었고, 부정적인 선입관으로 허울뿐인 부부관계에 놓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장애요소가 오히려 영롱한 매혹의 빛을 발하면서 서로의 가슴에 뜨거운 사랑의 불꽃을 피우게 된것이다. 노국공주에게 점점 빠져들었던 공민왕! 그렇다면 노국공주는 어떤 여인이었던가?
 
그녀는 칭기스칸의 후손으로서 황족인 위왕의 딸이었다. 그 후예답게 씩씩하고 용감했으며, 아름답고 영리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몽골보다 고려를 더 사랑했고 공민왕에게는 왕의 여인을 넘어 생명의 은인이면서 평생 동지였다. 말을 탈 줄 몰랐던 왕에게 말 타는 법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공민왕의 꿈인 개혁정치와 반원정책을 지지했고, 원이 뒤에서 사주한 흥왕사 난에서는 목숨 걸고 왕을 지켜준 여장부였다. 왕이 숨은 방 앞에 앉아 반란군을 가로막은 사실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노국공주, 국모를 향한 만백성의 사랑 또한 뜨거웠다. 노국공주를 만나 꽃 피우던 사랑으로 공민왕은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되고, 청보리 같이 싱그러운 개혁의지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토록 아름다운 부부금슬에 비해 결혼 15년 만에 회임하여 그 기쁨이 온 누리를 덮고도 남았으나 이듬해에는 난산으로 산모도 아이도 사망하고 만다. 문자 그대로 “호사다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개혁 정책이 자리를 잡아가던 중차대한 시기였는데 말이다. 그녀로 인해, 그녀가 있음으로 빛을 발하던 공민왕의 통치이념과 삶의 의미들은 빛을 잃은 채 시들어버리고 만다. 왕을 응원하고 힘을 실어주던 공주의 죽음 이후 그토록 맹위를 떨치던 개혁 군주는 어디로 간것인가?
 
공주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 벽에 걸어두고 식사하다가 대화를 나누는가하면, 장대 같은 눈물을 쏟으며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난마처럼 얽혀있던 정사는 내팽개치고 있었다. 지엄한 왕도를 저버린 채 매일 밤 만취 상태로 술에 의지하여 공주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런 공민왕을 두고 백성들 사이에는 왕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절제와 금욕의 대명사이며,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난 왕이 급기야는 온갖 추태와 기괴한 일을 자행하면서 고려의 국운도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다.
 
특히 왕을 경호한다는 명목으로 설립된 ‘자제위’는 결국 왕의 목숨을 빼앗는 것으로 본말이 전도되었다. 자제위는 귀족의 자제들로 젊고 잘 생긴 청년들을 선발했는데 자제위의 청년들과 왕 사이에는 온갖 음탕한 괴담들이 들끓었을 정도였다.
 
위업에 빛나던 개혁군주에서 남색(동성애), 관음증 등등의 변태적 군주로 전락했던 공민왕. 하지만 그 가슴의 언저리에는 늘 처음그대로의 영원한 그의 신부, 노국공주가 자리하고 있었다. 궁궐에는 꽃다운 비빈들이 다투어 성은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일편단심 오로지 공주만을 사랑했던 순정남. 왕조의 쇠락은 탑처럼 쌓여가던 그토록 애절한 그리움을 극복하지 못한, 그의 굴절된 생애에도 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홍윤, 최 만생 등에 의해 처참하게 시해당한 공민왕(45세)은 죽어서 사랑하는 여인 곁으로 가게 된 것이려니.
 
북한의 경기도 개풍군 봉명산에는 공민왕릉(현릉) 옆에 왕비 노국공주의 능(정릉)이 나란히 있다. 공주가 먼저 죽자 왕은 죽어서도 함께 하려는 마음에서 이 무덤을 만들었다 한다. 왕조가 바뀐 조선 종묘의 사당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함께 모셔져 있다. 참으로 전무후무한 일이다.
 
늘 처음처럼 한결같이 서로 사랑한 두 사람을 보는 듯한 쌍릉의 모습! 까마득한 세월이 흘러도 사랑은 남는 것인가? 고려 왕조의 눈물인양 붉은 꽃잎이 비 오듯 떨어지는 계절에 그들의 영원한 사랑, 그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아프게 전하고 있다.
 
 
[2015424일 제6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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