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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로맨스

화사한 로코코의 장미, 처참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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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그녀를 생각만해도 식도를 타고 용솟음치는 피가흐르는 듯하다. 세계사를 장식했던프랑스 대혁명과 부르봉 왕가의 몰락, 그 중심에 있었던 루이 16세와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일명 기요틴)에서 참수(斬首)되어 처형된 사건을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런 엄청난 사건은 왜 일어났으며, 왕과 왕비의 처형, 그 요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먼저 그들의 정략결혼부터 살펴보자.프랑스 왕세자와 케사르 대제국사이에서 합의된 이 혼인은 두 나라의 친선정책의 성격을 지녔고, 그녀에게는 일방적으로 통고되었다.
 
57대의 마차를 이끌며 결혼을 위해 비엔나를 떠나올 때는 1770년 4월 21일, 그녀가 만 14세 4개월이 되었다. 왕세자비가 지나는 곳마다 쏟아지는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은 그녀의 생애가 온통 장밋빛으로 채색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목표지점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눈에 들어오는 대상은 그림자를 한껏 감싸 안은 소년, 루이 오귀스트 왕세자였다. 15세의 마르고, 창백하고, 서 있는 그 자체도 고역으로 보일 정도였으며, 눈을 너무 내리깔고 있어 자신의 아내가 될 소녀를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5월 16일 랭스의 대주교 주례로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결혼식이 거행되었으나 왕세자비는 일말의 불안한 예감에 당황한다. 그 불안이 현실이 되어 그녀를 옥죈다. 결혼 7년, 왕비가 된지 3년째인 1777년 그녀 나이 21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처녀로 남아 있었다.
 
즉 왕이 남자 구실을 못한다는 풍자 노래가 퍼져나갈 정도였다. 결국왕비의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파리에 와서 불능 치유의 수술을 받도록 하여 왕비는 임신하게 되고, 왕자 2명 공주 2명이 탄생한다.
 
이때부터 아버지가 되게 해준 아내에게 다이아몬드와 루비로 사랑을 표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부부생활로 그녀는 파티, 도박, 보석, 의상, 장신구 등으로 불만을 해소했다. 왕비는 용모가 빼어났다기보다 고운 자태와 발랄한 태도로 사람들을 매료시켜 우아하고 경쾌한 ‘로코코의 장미’로 찬미되기도 했다.
 
하지만 90퍼센트를 차지하는 국민들의 빈곤과 비참상은 목불인견인데 왕과 왕비의 씀씀이가 도를 지나쳐 국고는 텅텅 비고, 늘어가는 적자는 메울 길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안이 이런데도 왕비의 별장튈르리 궁을 보수하는데 천문학적인 공사비를 쏟아 부어 왕실의 몰락을 부채질 했으며, 왕비를 향한 불만은 폭발할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국민의 공공연한 적이 되었다.
 
성불능치료로 4명의 자녀 뒀으나 원만치 못한 부부생활
앙투아네트, 스웨덴 귀족과 불륜의 사랑으로 단두대 처형
 
이때 프랑스에서는 이미 시민의식이일어나고 루소, 볼테르 등의 계몽사상 영향으로 ‘왕권신수설’이나 ‘신성불가침’은 이미 빛을 잃고 있었다. 여기에다 점점 심화되는 국민의 불만은 급기야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했다.
 
국민들이 즐겨 불렀다는 풍자노래이자 참요(讖謠)인 “스무살의 순진한 왕비님, 화려한 놀이를 벌이지만 그러느라 어느 새 옥체는 궐 밖에 있네”라는 노랫말은 왕비의 불행한 앞날을 예고하지 않은가? ‘적자부인’, ‘골이 빈 부인’. ‘적국의 여인’으로 자리매김 된 왕비,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라고왕비는 말했다지만 거짓 소문이었으나 당시의 민심을 반영한 것으로보인다.
 
외면의 화려함과는 다르게 왕비의 내면은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웠기에 아첨에 약하고, 사기의 빌미를 제공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목걸이 사건’이었다. 그녀는 무죄라고 밝혀졌지만 군중들은 왕비가 꾸민일로 매도했고, 그녀를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누구였으며 어떻게 만났을까? 그는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이란 남자로 스웨덴의 대 귀족이자 기사였다. 궁정에서 열린 가장무도회를 통해 만난 그와는 이내 연인사이로 발전했는데 그의 나이 19세였다.
 
흔히 벼락의 일격으로 표현되는 첫눈에 반한 상황이었다.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가했으며, 빛나는 외모와 생기발랄하고 세련된 몸가짐을 가지고 있었다.즉 우유부단하고 패기 없는 루이
와는 정반대의 인물로 그들은 이내 사랑에 빠지고 만다.
 
대륙의 왕비와 외국 귀족과의 사랑은 불륜이라 할지라도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순수한 일념으로 생을 다할 때까지 타올랐던 사랑이었기 때문일까? 튈르리 궁에서 페르센은 밤을 틈타 그의 전용인 뒷문을 통해 자유롭게 드나들며 연인을 만났다.
 
이 궁은 1층 과 2층을 연결하는 좁은 계단이 마련되었는데 그들의 밀회 등은 이 계단을 통해 이뤄졌다. 그가 그녀의 손에 끼워준 반지의 글귀처럼 “모든 것이 나를 그대에게 인도합다”라
는 사랑의 신뢰와 맹세로 보낸 20년. 죽음조차도 그들의 사랑을 소멸시키지 못하리라.
 
앙투아네트는 혁명 때 가족과 함께 도주하다가 바렌에서 체포되고, 죄수가 되어 단두대에서 37세에 생을 마감했다. 물론 루이 16세가 먼저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화려한 궁정에서 처참한 감옥으로, 온 국민의 환영에서 들끓는 증오로, 지고의 자리에서 단두대로 내몰렸던 운명앞에서도 의연했던 그녀의 “나는 괜찮습니다”라고 연인에게 쓴 편지글.
 
한편 페르센은 그녀의 사후엔 심장이 없는 차가운 남자로 변했고 고통은 계속되었다. 독신으로 살았으며 “나의 비통한 마음은 내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녀가 간 지 18년 후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를 암살했다는 허위 사실로 폭도들에게 피살되어 스톡홀름의 번화가에서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참상을 상쇄할 수 있는 것도 불가사의한 사랑의 힘으로서 우리의 가슴을 흠뻑 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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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4일 제71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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