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04월 20일

노래로 불러본 천년의 사랑

만월부인 왕후의 빗나간 아들사랑

노래로 불러 본 천년의 사랑 <10>혜공왕과 만월부인
  
1.png

 
박진환.png
갑오년 새해벽두부터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여기에 반갑잖은 귀객(鬼客) 중국발 미세먼지까지 온통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삼국사기』에도 ‘하늘에 노란 꽃비가 내렸다’라는 표현으로 황사를 말하고 있는것을 보면 그 연원은 참으로 오래인 것 같다.
 
이렇게 한파와 미세먼지에 시달릴 때면 고향집 안방 아랫목에 어머님이 묻어 놓은 하얀 쌀밥과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 떠오른다. 그 어떤 추위가 찾아와도 또 그 어떤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을 지라도 어머님의 따뜻한 품은 그냥 그대로가 좋았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어머님의 품이 따뜻하기는커녕 매서운 시베리아 한파를 넘어서고 북극 남극과 같은 극한지대보다도 더 차가운 어머님의 품이 있었으니 바로신라 36대 혜공왕의 어머니 만월부인이었다.
 
만월부인은 신라 35대 경덕왕의 둘째 왕후였다. 첫째 왕후인 사량부인이 아들을 얻지 못하자, 왕은 그를 내치고 만월부인을 얻어 마침내 혜공왕을 낳기에 이른다. 그러나 혜공왕이 태어나는 순간 이미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역사 기록에도 딸로 태어날 운명인 아이를 표훈대사가 상천에 가서 아들로 바꿔오는 것으로 설정하여 이미 비극을 예고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왕은 원래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첫돌부터 즉위할 때까지 항상 계집애들의 놀이를 하면서 자랐다.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했으며,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고 노니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고 혜공왕의 성색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혜공왕이 여덟 살에 왕위에 올랐다보니 어머니 만월부인이 섭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월부인이 누구인가. 경덕왕의 어마어마한 거시기를 받아들여왕자를 생산한 사람이 아닌가.

『삼국유사』「경덕왕표훈대덕」에 <찬기파랑가>는 이렇다하며 향가의 가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왕의 옥경의 길이가 여덟 치였다’는 다소 뜬금없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갑자기 왕의 거시기 크기를 기록한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과연 일연스님은 왜 왕의 옥경을 적나라하게 적어놓았을까. 그리고 새로 얻은 왕비의 이름이 만월(滿月)이라니. 묘한 상상력이 일어나는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2.png

어쨌든 만월부인은 아들 혜공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면서 신라 정계를 쥐락펴락하게 된다. 여기에는 더 큰 권력인 친정오라버니 김옹이 있었다. 혜공왕 때 주조가 끝난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 명문에 만월부인의 오라버니김옹의 관직이 적어져 있다.
 
적어보면, ‘검교사 병부령 겸 전중령 사어부령 수성부령 감사천왕사부령이자 아울러 검교진지대왕사사인 상상 대각간 김옹’이다. 한 사람의 관직이 도대체 몇 가지인가. 거의 혼자서 신라 정계를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혜공왕의 뒤를 이어 37대 선덕왕에 오르는 김양상보다도 더 많은 관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명문에 김양상의 관직은 ‘검교사 숙정대령 겸 수성부령 검교감은사사인 각간’이다. 아들은 통일신라의 지존인 왕이고, 친정오라버니는 모든 중앙정계의 관직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자신은 왕태후로 섭정을 하는 장본인이 아닌가. 당시 만월부인의 위세는 천하의 미색 미실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권력의 전횡은 하늘도 노하는 법. 이찬 김지정이 난을 일으켜 궁궐을 포위하고 왕과 왕비를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혜공왕이 궁궐에서 살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큰 의문이 발생하고 있다. 친정오라버니가 중앙정계를 장악하고있었고, 자신은 왕태후로 섭정을 했던 만월부인이 이 난리를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 당시의 만월부인의 힘으로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기록이 전무한 것을 보면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은 아닐까.
 
김지정이 난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자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이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왕궁으로 군사를 동원하기에 이른다. 난을 진압한 상대등 김양상이왕위에 올라 그가 37대 선덕왕이다. 그 후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돌아가자 함께 난을 진압한 김경신이 왕위에 오른다. 그가 38대 원성왕이다. 즉 괘릉의 주인공이다. 원성왕이 왕위에 오를 때 김주원 일파와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왕위다툼에 패한 김주원은 강릉군왕에 봉해져 지방으로 내몰렸던 것이다. 이 김주원이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때의 한이 얼마나 높았던지 강릉김씨의 후예인 매월당 김시습은 조선초 세조의왕위찬탈을 문제 삼아 전국을 유람하면서 경주 남산 용장사에서 <금오신화>를 창작하면서 조상의 한을 위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민초들의 한 ‘에밀레종(신종)’ 설화로 인구에 회자
 
섭정하며 신라정계 쥐락펴락 향가에 비운 예고
 
재미있는 것은 매월당 김시습은 서라벌과 관련된 수많은 시문을 남기고 있는데 특히 자신의 시에 ‘사뇌조’라고 분명하게 향가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 향가의 흔적을 남긴 이는 아무도 없다. 매월당이 유일하다고 할 수있다. 그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정확한 의식을 가졌으며, 천년 신라의 노래 향가를 기억하고 사라짐을 애석해 하였을지 의문이다.
 
혜공왕의 어머니 만월부인은 김지정의 난을 진압할 수 있는 권력과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아들 혜공왕이 궁궐에서 왕비와 함께 시해 당하게 된다. 이 사건을 지켜 본 민초들은 울분을 터트리면서 만월부인을 원망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민초들의 한이 당시에 주조를 끝낸 성덕대왕신종 즉 에밀레 종 설화로인구에 회자된 것은 아닐까.
 
아무리 종의 주조가 어렵다고 한들 설마 아들을 주물 속에 넣어서 완성하였을까. 또 그 아들의 외침이 ‘에밀레, 에밀레’한다고 에밀레 종이라고 하였을까. 아마도 민초들은 혜공왕 시해사건을 막을 수 있었던 만월부인이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은 아닐지.
 
이때의 만월부인의 심정이 조선조 <한중록>의 저자 혜경궁홍씨의 마음과 같았을것이다.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친정아버지 영의정 홍봉한이 있었지만 막지 않았다. 이유야 어떻던 아들과 남편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여인의 심정은 에밀레종 설화로 남기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나눠가지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특히 차가운 북쪽의 2인자 장성택의 처참한 말로를 보면 함께 갈수는 없고 오직 혼자만 갈 수 있는 길이 권력인가 보다. 민족의 대명절 설이 다가오고 있다. 까치까치 설날엔 쇠고기 고명에 사골국물 떡국으로 따뜻한 온기를 나누며 갑오년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더불어 에밀레종의 맥놀이를 들으며 새해를 희망하는 것도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2014년 1월 22일 제48호 13면]
 

추천0 비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