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04월 18일

노래로 불러본 천년의 사랑

단비같은 천년신라 화랑들의 사랑이야기

 
노래로 불러 본 천년의 사랑 <6> 사다함과 무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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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왼쪽은 반월성 구지(사다함의 사우 무관랑을 집어삼킨 구지 전경), 사진오른쪽은 비석사진(임신서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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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입추(立秋)가 지났지만 아직은 하늘에서 광염을 멈추지 않는다. 이럴 때 소나기라도 한 줄기 내리면 만물이 반가워서 서로 뒹굴 것인데…
 
집안 베란다에서 숨을 헐떡이며 겨우 목만 조금 내밀어 이 무더위를 온몸으로 맞이하는 작은 화분이 오늘따라 무지 애잔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시원한 생명수 한 바가지를 흩뿌려 주니 이내 생기가 돌아 맑게 웃고 있다. 이처럼 자연은 인간 군상들과 교감을 바라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네 선조들은 장마가 계속되면 기청제(祈晴祭)를 가뭄이 지속되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며 자연과의 대화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슈퍼컴퓨터로 기상예보를 하면서 인간의 오만이 그만 하늘을 노하게 만들어 특정지역에는 폭우가 다른지역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폭염을 쏟아 붇고 있다. 이제라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어떨까?
 
이복중 혹서(酷暑)에 단비 같은 천년신라의 화랑들의 사랑 이야기가 화석화 된 채 남아 있다. 이 아름답고도 숭고한 사랑은 사다함과 무관랑의 우정을 뛰어넘은 사랑일 것이다.
 
때는 신라 24대 진흥왕 시절이었다. 사다함은 5세 풍월주를 지낸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 그러나 그를 죽음으로 내몬 사건에는 무관랑과의 우정이 자리하고 있다『. 삼국사기』「사다함전」을 보면 무관랑이 죽자 사다함은 사우(死友)의 맹서를 지키기 위해 이레를 슬퍼하다가 그를 따라 갔다고 한다.
 
사실일까? 답은 ‘사실에 가깝다’고 할수 있다. 이런 것을 말해주는 유물이 경주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934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지 부근에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고 명명된 화랑들이 하늘에 맹서한 자연석이 천년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한문문장이 아닌 우리말식의 한문체로 후일 ‘서기체’로 이름 지어졌다.
 
그 내용을 보면, "임신년(壬申年)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서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서하여,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집지(執持)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 이 일(맹서)을 잃으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서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가히 행할것을 받아들임을 맹서한다. 또 따로 먼저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서하였다.
 
시(詩經) · 상서(尙書=書經) · 예기(禮記) · 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서하되 3년으로 하였다."<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末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이 자연석에 새겨진 <임신서기석>에 두 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신라 화랑들이 하늘에 맹서한 것임은 바로 알 수가 있다. 이 맹서를 지키지 않으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을 것’이라며 천신에 대하여 굳은 약속을 한 것이 된다. 이처럼 신라의 청년들은 자신이 약속한 것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전통이 사다함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았을까 한다.
 
 
이와는 다르게 사다함과 무관랑의 죽음을 기록한 화랑들의 전기인『화랑세기』필사본이 발견된 지도 이십여 년이 지났다. 이 서책에는 무관랑이 사다함의 어머니인 금진과의 사통으로 인하여 반월성을 넘다가 구지(溝池)에 빠져 죽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구지란 성곽 둘레에 파놓은 인공구조물로 성곽 방어에 필요한 시설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구지 덕분에『화랑세기』가 진본(眞本) 쪽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되었다. 왜냐하면 1984년 반월성 해자 유적 발굴 이전엔 구지란 말 자체도 몰랐기 때문이다. 만약『화랑세기』가 위본(僞本)이라면 일본 궁내청 도서료에서 필사를 해온 남당 박창화선생이 약 40년 후에 그 존재가 밝혀진 구지를 미리 조사하여 기록하였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화랑세기』에는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은 신라 최고의 미색 미실의 할머니인 옥진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진은 구리지와의 사이에 사다함을 설성과의 사이에 설원랑을 입종공(진흥왕의 생부)과의 사이에 숙흘종을 낳았다고 한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아들 사다함의 맹우인 무관랑과도 관계를 맺었다고 하니 하늘도 놀랄 일이다. 과연 이런 문란한 관계를 용인한 사회가 삼한일통의 주인공이 될 수가 있을까?
 
의문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이태 전 이런 얘기로 좌중이 충돌한 적이 있다. 이때 한 학자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었다. 그것은 삼국통일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청장년 남성들의 죽음이란 것이었다.
 
 
일 년에도 수십 차례 충돌한 삼국은 남성이 절대 부족했을 것이고, 그러면 이 부족한 남성을 어떻게 보충(?)하였을까? 여러분들의 상상력에 맡겨 보기로 한다.
 
사다함은 무관랑이 죽자 따라 죽은 것은 참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무관랑이 죽은 것만으로는 어딘지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진다. 화랑 풍월주를 지내고 귀당비장으로 대가야(고령)의 반란을 평정하고 대가야왕 도설지를 비롯하여 오천명의 포로를 이끌고 서라벌로 개선한 명장 사다함이 맹우의 죽음으로 슬퍼하다가 죽었을까?
 
아마도 사다함은 사우인 무관랑과 어머니 금진과의 사통, 부부의 연을 맺기로 한 미실의 입궁, 여기에 무관랑까지 죽자 세상을 살 희망을 버렸을 것이다. 사실 사다함은 열여섯 살에 귀당비장으로 대가야 반란을 진압하고 열일곱 살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대가야 전쟁에서 개선하고 바로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사람들은 사다함이 미실을 그리워하며 부른 <청조가>의 내용이 몹시 구슬퍼 앞 다투어 암송하였다고 한다.
 
한여름 복 더위에 사다함이 미실을 그리워하며 피눈물로 부른 <청조가>를 한 수 불러보는 것도 여름을 보내는 한 방법일것이다. 가만히 <청조가>를 불러본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靑鳥靑鳥 彼雲上之靑鳥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胡爲乎 止我豆之田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靑鳥靑鳥 乃我豆田靑鳥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胡爲乎 更飛入雲上去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旣來不須去 又去爲何來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空令人淚雨 腸爛瘦死盡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되리
吾死爲何鬼 吾死爲神兵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護神)되어
飛入<殿主護> 護神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朝朝暮暮 保護殿君夫妻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萬年千年 不長滅
<이 상>
 
[2013년 8월21일 제44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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