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03월 29일

노래로 불러본 천년의 사랑

구중궁궐의 공주도 님 그리워 긴긴밤 세웠네

노래로 불러 본 천년의 사랑<2>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스님과 공주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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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의 노란 꽃술이 매화를 불러 청매화 홍매화를 남풍으로 실어 보내고 있다. 참꽃이라는 진달래도 높은 키만큼이나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켜면서 어여쁜 속살을 봄바람에 하늘거린다.

봄이다. 서시, 달기, 양귀비와 더불어 중원 미녀의 대명사인 왕소군이 말했던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이라고, 외론 흉노족의 본거지에서 추위와 향수에 젖은 한(漢)의 여인을 보는 듯 봄이 드디어 우리를 살포시 찾아왔다.

우리네 삶이 항상 그렇듯 꽃이 피어야 시샘하는 추위가 찾아오고, 그것을 가슴 아파해야 어론님이 찾아와 아지랑이 봄밤을 서리서리 펴는 것은 아닐는지?
 
왕소군만큼 어론님을 그리워한 신라의 여인이 있었다. 그것도 여염집 여인이 아닌 천년신라 구중궁궐의 공주였던 것이다. 비록 백제와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어버리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신라 중대 진골 귀족이면서 살아 있는 절대 권력인 태종대왕의 공주였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첫째부인 보량궁주(미실과 설원랑의 아들 보종의 딸)와의 사이에 태어난 고타소를 남편인 품석과 함께 대야성(합천)에서 백제장군 윤충에게 살해당하는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아픔을 가지고 있던 태종은 둘째딸 요석공주를 특별히 아끼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요석역시 남편을 전쟁에서 잃어버리고 요석궁에서 홀로 기거하며, 기나긴 동지섣달의 밤을 하얗게 보내고 있으니 걱정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때 남루한 옷에 조롱박을 두드리며 온저자거리며 뒷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혜공과 대안이 삼태기와 바리때를 가지고 민중 속에 들어가 그들의 삶을 몸소 함께 체험하며 그들을 교화한 적이 있었다.
 
이를 본받기나 한 듯 민중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그들을 어루만지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명이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인 원효이다.
 
혹자는 원효의 아명이 서당이라는 것에서 향가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을 원효로 보기도 하지만, 아직은 호응을 얻기엔 빈행간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어쨌든 원효가 이때 부른 노래가 서라벌 골골에 흘러 궁궐의 태종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노래를 불러보면,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나(誰許沒柯斧) 하늘 버틸 기둥을 다듬으려네.(我斫支天柱)『 삼국유사「』원효불기」이 노래를 들은 서라벌인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태종은 “이 대사가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게다.
 
나라에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면 그보다 더 큰 이익이 어디 있겠는가.” 하면서 요석궁에 홀로 지내는 요석공주에게 원효를 맞아들이게 한다. 이에 요석궁의 종자들이 원효를 찾아 문천교(蚊川橋, 楡橋<유교:느릅나무 다리>라고도 한다)에 이르렀을 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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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아명‘서당’, 향가 서동요의 주인공으로 추측

요석공주 원효와의 사이 아들 설총 향찰이용 구경해독
 
종자들은 급히 원효를 데리고 요석궁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말리게 하였다. 이로 인해 과연 공주는 임신해 설총을 낳았다고 한다.
 
비유가 이 정도는 되어야 참뜻을 알기위해 되새김질을 하는 것이 아닐까? 태종이 허락을 했다고 그냥 덥석 받을 원효도 아니지만, 사실을 기록한 일연스님도 여기쯤에서 그만두어야 독자들의 무한상상이 흠집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은은한 매화향보다도 더한 매력이 고전 속에서 묻어나온다는 말이 참인 것 같기도 하고 묘한 상상력이 봄날을 자극하는 것 같다. 이후 원효는 소성거사로 자칭하면서 서라벌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나무불’을 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에는 없지만 요석공주는 원효를 찾아서 온 신라 방방곡곡을 누비었을 개연성이 높다. 왜냐하면 부산 금정산의 원효대, 경기도 동두천 소요산의 요석궁 등 반도 곳곳에 흔적을남기고 있으니 말이다.
 
원효가 있는 곳을 수소문하여 찾아간 요석공주는 자산을 팔아 세간을 마련하고 머무르기를 갈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원효는 수삼일이 지나면 다시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삼태기에 의지하여 떠나기에 바빴던 것이다.

매양 이렇게 떠나는 원효를 요석공주는 아들 설총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에 보상을 받으며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 목이 학모가지의 예닐곱 배는 되었을 것이다.
 
원효는『화엄경』에서 “일체 무애인(無㝵人)은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라는 구절을 따다가 무애라 이름하고는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고 한다. 고려 초 대승 균여가 향가 <보현십원가>를 지어서 백성을 불타에 의지하게 하였듯, 원효의 행동은 이후 우리나라 불교 전파의 하나의 전형이 되었지 않았을까 한다.
 
또한 원효가 부른 노래의 원형은 남이 있지 않지만, 아들 설총이 방음(方音)으로 구경(시경 · 서경 ·역경 · 예기 · 춘추 · 효경 · 논어 · 맹자 ·이아)을 해독하여 후생을 가르쳤다고 하는
데서 보듯 향찰 즉 방음으로 지은 노래인 향가가 아닐까 한다.

원효는 신라 26대 진평왕 39년(617) 압량(押梁), 현 경상북도 자인면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화랑세기』에 실려 있는 그의 가계를 보면, 7세 풍월주를 지낸 설화랑(설원랑)의 둘째아들 잉피가 원효의 할아버지이다. 즉 신라 6부의 하나인 고야촌장 호진공의 후손 설성 - 설화랑 - 잉피 - 담날 - 원효 - 설총으로 가계가 이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열전」<설총전>을 보면, 일본국 진인(眞人:씨성 제1위에 속함)이 신라의 사신 설판관(중업)에게 주는 시서(詩序)에 “일찍이 원효거사가 저술한『금강삼매경론』을 열람하고, 그 사람을 보지 못함을 깊이 한이 되어 여겼는데, 들은즉 신라국 사신 설(중업)은 곧 거사의 포손(抱孫)이라하니, 그 할아버지를 보지 못하였지만 그 손자를 만난 것이 기쁜 일이므로 시를 지어 준다.”고 기록하면서 설총의 아들 설중업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을 종합해보면, 설화랑 즉 설원랑의 무리들은 향가를 잘하여 운상인(雲上人)이라고 불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설화랑 역시 향가의 창작층 및 향유층에 속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후손 원효 역시 향가에 능통한 것이 아닐까 강한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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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살폈듯, 원효도 향가를 이용하여 불타를 세상에 설파하였을 것이다. 그 영향이 자연스럽게 설총에게 이어져 방음 즉 향찰을 이용하여 구경을 해독하여 백성을 보듬었을 것이다.
 
이처럼 요석공주는 비록 여인의 삶으로 는 매우 어려웠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들 설총이 우리나라 유학의 종주로 자리매김하여 고려 현종 13년 홍유후(弘儒侯)로 추증 받게 되었고, 손자인 설중업이 일본으로 사신을 가는 등 대대로 명문가의 명성을 날리게 되는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남편이면서 우리 역사 방외인의 시원(始原)을 개척한 원효 역시도 고려 숙종 6년(1101)에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받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삼한일통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한 사람의 과부로 친정아버지를 한 나라의 왕으로 둔 공주로 상반된 영욕이 함께 점철된 요석공주이지만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6두품인 자신의 시댁 가문을 신라 최고 귀족의 가문으로 길이 빛나게 하였다는 것을 보면, 연약한 여인이라기보다 영국의 대처 수상 못지않은 철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한다. -계속-
 
 
[2013년 3월 28일 제40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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