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04월 24일

노래로 불러본 천년의 사랑

천년신라 유부남과 진골귀족의 아름다운 사랑

노래로 불러 본 천년의 사랑><1> 태종무열왕과 문희
 
 
우여곡절 끝에 사랑쟁취·친정을 서라벌 최고의 가문으로
 
 
 섣달이 되어도 동장군은 그 기세를 꺾지 않는다. 그 도도한 기품이 춘추공을 닮은 것 같다. 특히 드라마 <대왕의 꿈>을 보면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왕위에 오른 춘추공의 기세가 그러하다고 할 수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 든 굽이굽이 펴리라’고 노래한 송도삼절 황진이가 아니었던가. 동짓달의 밤길이가 얼마나 길었으면 그밤의 허리를 반으로 베어 내어서 짧은 봄밤 사랑하는 님이 오시면 그것을 붙여서 오래오래 정을 나누고 싶었을까?
 
기녀의 사랑도 이쯤은 되어야 추운 겨울을 느긋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닐지. 천년신라에도 이 같은 사랑이 서라벌 하늘의 별만큼 많았다. 이 세상 인간이 사는 곳에 사랑이 없는곳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오랫동안 마음에 머무는 아름다운 사랑은 천년의 사랑이 제격일 것이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폐위된 신라 25대 진지왕의 손자이다. 곧 용춘공의 아들이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아버지 용춘공과 신라 26대 진평왕의 둘째 딸인 천명공주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그러나 1989년 홀연히 우리 곁을 찾아온 필사본《화랑세기》에는 이와는 매우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즉 진평왕의 둘째딸로 기록된 천명이 맏딸이고, 선덕이 둘째딸로 나온다. 또한 용수공과 용춘공은 형제이고, 용수공과 천명공주와의 사이에 태어난 춘추를 용수공이 죽으면서 용춘공에게 의탁하였다고 한다.
 
기존 역사서에도 용수공와 용춘공을 다른 사람으로 기록하다가 어느 순간 같은 사람으로 용수 또는 용춘으로 기록한다. 진평왕 44년 2월 “이찬 용수로 내성의 사신을 삼았다.” 동왕 51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 · 서현과 부장군 유신을 보내어 고구려 낭비성을 침공케 하였다.”고 다른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가 신라 27대 선덕여왕 4년 10월에 “이찬 수품과 용수 또는 용춘을 파견하여 주군을 순무케 하였다.”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즉위년에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 또는 용춘의 아들이다.”라고 같은 사람으로 슬그머니 둔갑시켜 놓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무엇 때문에 두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바꿔 놓을 수밖에 없었을까? 수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춘추공의 아버지 부분도 의문의 연속이지만 춘추공과 유신공의 둘째 여동생 문희와의 관계 설정에도 똑같은 의문의 연속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유신공의 첫 여동생 보희의 오줌 꿈 설화이다. 보희가 꿈에 서형산에 올라앉아 오줌을 누니 서울 안에 가득 찼었다고 한다. 보희가 동생 문희에게 꿈 이야기를 하자 “내가 언니 꿈을 사고 싶다.”고한다.
 
그래서 비단치마를 받고 팔았다고 한다. 그 뒤 유신공이 춘추공과 축국(蹴鞠)을 하다가 춘추공의 옷고름을 떨어뜨렸다. 이에 유신공은 춘추공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옷고름을 꿰매 주게 되었다. 이때 보희는 무슨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그 동생 문희가 대신 하게 되는데 이때의 일로 태기가 있어 사내 아이를 낳으니 법민(문무왕)이라고 한다.
 
옷을 꿰매어 주었을 뿐인데 태기가 있다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물론 원효가 요석공주의 집에서 다만 젖은 옷만 말렸을 뿐인데 설총이 태어났다는 얘기도 있으니 이상할 것은 없다.
 
이때 보희의 무슨 일이 병이라고 기록한 사서도 있다. 그럼 무슨 병일까? 혹자는 이 병이 여성 아름다움의 절정인 매달 찾아오는 매직이라고 한다. 그럴 듯 하기도 하다.
 
어쨌든 문희는 춘추공과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태기가 있는데도 춘추공은 문희를 외면하고 있다. 그래서 유신공은 장작더미에 문희를 올려놓고 태워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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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지 않는가? 춘추공과 문희와의 사이를 이어준 사람이 자신인데 모른다고 하니 무슨 곡절일까?《화랑세기》에 해답이 있다. 사실 춘추공은 문희를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첫 부인인 보량궁주는 미실과 설원랑 사이에 태어난 보종의 딸이다. 결국 미실의 손
녀란 말이다. 둘 사이에 이미 고타소란 딸을 두고 있었다.
 
이 고타소가 선덕여왕 11년 8월 백제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함락시킬 때 대야성주인 품석과 함께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춘추공은 이미 부인이 있는 몸으로 문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
던 것이다.
 
결국 춘추공과 유신공이 함께 짜고 친 고스톱인 장작더미 사건으로 선덕공주의 힘을 빌려 포석사에서 혼례를 올리게 된다. 얼마 안 있어 보량궁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문희가 드디어 정궁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사의 기록서인《삼국사기》는 철저하게 미실이란 존재를 없애 버린다. 당대 신라 최고의 미색과 정치력을 가진 미실을 김부식은 왜 이렇게 철저하게 무시를 했을까? 또한 미실을 지우다 보니 춘추공과 김유신의 결혼이 사실과 어긋나게 된 것이 아닐까?
 
춘추공은 미실과 설원랑의 사이에 태어난 보종공의 딸인 보량궁주와 첫 결혼을 하고, 유신공도 미실과 세종의 사이에 태어난 하종공의 딸인 영모와 첫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은 미실을 역사에서 삭제하다보니 유신공이 환갑에 결혼을 하는 것으로 설정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
 
당시 평균수명이 환갑에 미치지 못했고 또한 명문거족인 유신공 가문이 과연 맏아들인 그를 환갑까지 결혼을 하지 않도록 방치하였을까? 물론 김부식 당대의 가치관으로는 여자인 미실이가 신라 중앙 정가를 쥐락펴락하는 것이 못마땅하였을 것이다.
 
김부식의 이런 생각의 일단을 읽어 볼 수 있는 기록이《삼국사기》에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史臣이 논하여 말하기를 하늘로 말하면 양은 강하고 음은 유(柔)하며,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거늘 어찌 노구(할멈)로 규방을 나와 국가의 정사를 재단케 하리요.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를 잇게 했으니 진실로 난세의 일이며, 이러고서 나라가 망하지 아니한 것은 다행하다 할 것이다”면서 여왕을 세운 신라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현재의 잣대로 본다면 그냥 웃을일이다. 헌정사상 처음 여성대통령을 맞이하여 취임식에 이른 지금 격세지감을 넘어서 약간의 분노도 함께 떠오른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남녀의 왜곡된 이분법 정서가 다른 나라보다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에만 3명의 여왕을 옹립하였고, 미실이란 뛰어난 여성이 신라의 정치를 좌지우지 하였으니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문희는 우여곡절 끝에 태종무열왕과 사랑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왕후가 되어 아들인 법민이 신라30대 문무왕이 되어 삼한일통을 완성하게 된다. 언니의 오줌 꿈을 비단치마와 바꾸는 혜안을 보인 문희는 신라왕실의 안주인으로 지위를 격상하게 되었고, 친정인 가야계 진골집안을 서라벌 최고의 가문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하게 된 것이다.
 
한사람의 여성으로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결정하는 문희의 모습에서 앞으로 다가올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모습이 함께 오버랩 되는것은 무슨 일일까?
 
태종무열왕 시절에 양산가가 서라벌에 울려 퍼졌다고 한다. 김흠운은 내물왕의 8세손으로 화랑 문노의 문에 있게 되었다. 그는 태종대왕의 사위이면서 655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게 되자 서라벌 사람들이 슬퍼하면서 양산가를 지어 슬퍼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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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5일 제39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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